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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책소개) 문학의 힘과 문학의 한계 - 분노의 포도를 읽고

(※ 책소개 글을 공유한다. 오래 전 읽은 데다가 원서로 하루에 조금씩 아주 오래 읽어서 내용만 겨우 떠오르는데 이렇게 상세히 쓴 독후감을 보니 새롭다. 더구나 당시 생각하지 못했던 차원에서 생각한 글을 보니 더욱 생소하다.)

작가
존 스타인벡
출판
민음사
발매
2008.03.24.
평점








지난번에 유명한 고전 작품 “오만과 편견” 독후감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 올해 읽었던 다른 고전 문학 작품에 대한 독후감을 추가로 올릴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올해 1월부터 해서 3월 까지 약 2개월 반 동안 읽었던 존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에 대한 독후감을 써보기로 했다. 작품의 주제와 내용전개, 묘사 등이 워낙 강렬해서 반년이 지난 아직까지 이 작품에 대한 생생한 인상과 그 때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다. 그리고 반 년이 지난 내가 지금 이 작품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해서 평하자면 이 작품은 문학의 힘과 문학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전형적인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대공황과 가뭄의 여파로 오하이오주에서 조상 때부터 농사 짓고 살던 땅을 저당권 행사를 하려는 은행에 모로지 차압 당한 조드 일가가 먹고 살기 위해 모든 가재 도구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 한 후 트럭을 타고 농장에 일자리가 널렸다는 캘리포니아로 온갖 고생을 하며 떠나는 과정과 정작 그곳에 도착해서 예상과 달리 역시 극심한 가난과 비참한 빈곤에 시달린 다는 내용이다. 소설의 주제는 그야 말로 돌직구다. 당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수 많은 빈곤 농민들의 고통과 절절한 아픔을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 또한 소설 속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병이 난 아이들과 돈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해 트럭에서 죽어가는 노약자들, 움막이나 창고 같은 데서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배고픔과 싸워가며 사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일반적 수준의 감수성과 감정이입 능력을 갖췄다면 누구든 이 소설을 편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었을 미국 사람들은 더욱더 괴롭고 마음이 심란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가난한 이들을 고통 받는 사회와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이용해서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가만히 있는 자신에 대해 무력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이 당대 사회적 모순과 문제들을 대중들에게 넓이 알리고 그들의 사회적 감수성 폭발시켜서 수면 속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림으로써 사회 진보의 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한다면 분노의 포도야 말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문학 작품 하나가 수 많은 정치가와 사회 운동가들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해낸 고전적인 사례는 이미 꽤 있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노예제 폐지 문제를 전 미국에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렸으며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대 영국 사회 내 빈민고아 아동들에 대한 극도로 열악한 환경과 빈민구제법의 문제점들을 사회적 여론화 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문학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 속에 빠지게 해서 비교적 쉽게 고난 받는 주인공에 감정이입 하게 만든다. 그래서 문학은 사람의 이성보다는 감정을 움직이고 감수성을 자극해서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행동하게 만든다. 하이트가 지적했다시피 사람의 심리를 추동 하는 힘은 역시 감정과 거기서 파생된 직관이며 이성은 일반적으로 단지 그 감정과 직관을 근거로 한 판단을 논리적으로 정당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아마도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 때문에 이성적 논리적 논픽션 보다는 픽션이 일반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잘 설득하고 더 잘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분노의 포도는 문학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박력과 패기 넘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작품이 문학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은 사회적 모순과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내서 사람들에게 과감 없이 보여주는 데는 대단히 성공하였으나 동시에 작가가 직관적으로 파악한 그 모순과 문제의 원인을 드러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문학의 한계를 여지없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관점에서 이 모든 인간적 인도적 비극의 궁극적 원인은 일부 인간들의 탐욕과 사회의 약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 그리고 무관심이며 더 나아가 그 배우에는 탐욕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더욱 증폭시킨 산업화된 기계 물질 문명 있다고 본다. 물론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탐욕과 무관심에 대한 질타가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 분명 일정 부분 도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수 많은 미국의 가난한 농민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으며 그 궁극적 해결 또한 도덕적 호소 보다는 올바른 정책적 접근이 필요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이 작품의 배경이 된 1940년대 미국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다른 시대 다른 곳에 비해 특별히 더 탐욕적이고 더 무관심했을 거라는 추측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탐욕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최소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는 인간 문명이 생긴 이래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을 것이며 그러한 탐욕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다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소들과 결합되었을 때만 특히 문제가 되었지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자 조드 일가가 극도의 가난을 경험하게 된 사회적 배경인 경제 대공황을 원인을 인간의 탐욕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그리고 조드 일가를 극도의 가난에서 탈출 시키지 못한 것도 인간성에 내제된 탐욕과 무관심 보다는 정부의 경제 정책실패 탓을 돌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 쉽게 일확천금을 얻고 싶은 투기 욕망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했으며 평소 선량하고 검소하게 사는 사람도 사회적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너도 나도 투기 행렬에 줄을 서기 마련이다. 그리고 평소 검소하고 선량한 사람들 까지 투기에 나선 것은 이미 자산 거품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지기 직전이라는 명백한 신호이며 1929년 10월 그 거품이 터지자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경제대공황이 시작된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자산 거품이 붕괴되어 경제적 공황과 뱅크 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 정책 내용도 참고할 과거 사례나 경험도 그리고 그런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학문적 연구이론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식시장과 자산 가치가 폭락하자 이러한 자산 투기를 위해 은행에서 빌린 빛에 대한 상환 압력이 강해지고 상환을 위해 다른 자산을 너도 나도 팔자 자산 가치는 더욱 폭락한다. 그리고 빛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은행들은 너도 나도 더욱 상환 압력을 가하고 빌려준 돈을 때일 위험에 처했다는 은행에 돈을 예금한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에 너도 나도 은행에 가서 돈을 인출 한다. 이러한 뱅크 런으로 은행들이 줄도산을 하고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자산과 돈을 잃은 사람들은 겁에 질려 소비를 하지 않는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공장에 재고가 쌓이고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직원들을 해고 하고 수입을 잃은 사람들은 더욱더 소비를 안하며 다시 물건은 안 팔리고 기업들은 문을 닫고 도산한다. 그리고 또 실업자들이 발생한다. 전형적인 대공황 디플레이션 악순환이다. 이러한 디플레이션은 산업화된 경제에 주기적으로 발생하며 인간이 탐욕을 줄인다고 없어질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정부는 일단 은행 도산을 야기시키는 뱅크 런을 막기 위해 은행 예금자들의 예금에 대해 지급 보증을 해줘야 하며 은행에 무제한 대출을 해줘서 은행이 돈 가뭄에 시달려 상환 압박을 하거나 받도록 하는 것을 방지해 줘야 한다. 일단 이러한 조치를 통해 금융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 추가적으로 금리를 인하해서 돈이 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지출을 하고 공공 사업을 벌여 실업자를 흡수하여 부족한 소비를 발생시켜 인위적으로 수요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사람들이 예전처럼 물건을 사고 공장과 기업은 다시금 생산을 늘리고 해고된 사람들을 다시 고용 할 수 있다. 거품 붕괴와 디플레이션에 맞서 정부의 이러한 적극적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지금 우리 시대에는 매우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부 역할 이었다. 설사 중앙은행과 정부 관료들이 직관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은행에 지급 보증을 해주며 재정지출로 실업을 흡수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감히 적극적으로 할 염두를 못 내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당시 경제 영역과 관련 정책을 지배하고 있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청산주의  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청산주의야 말로 인간 탐욕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심판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자산 붕괴는 인간의 지나친 탐욕의 결과이며 그래서 생긴 자산 폭락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라는 세계관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파생된 경제 대공황은 탐욕에 찌든 사회에 대한 도덕적 징벌이며 이러한 정의로운 징벌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정의롭지도 온당치도 못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징벌은 사회를 정화시킬 것이며 그럼 으로서 정의와 도덕이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공급과 수요 불일치에서 비롯된 경기침체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며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불일치가 해소되고 다시 경제는 호전될 것이라는 경제학의 고전주의 또한 정부의 개입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고전주의에 따르면 오히려 정부의 인위적 개입은 스스로 정상상태로 회복하고 있는 경제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삽질 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조드 일가를 극심한 고통에 빠지게 한 원인은 구태어 따지자면 적절한 정부 정책을 펴지 못하게 막은 잘못된 이념과 세계관, 그리고 낡은 학문적 이론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고 탓할 수 는 없는 것이, 그 당시 경제 대공황은 규모적으로 그 이전에는 겪어보지 없었던 초유의 사태였으며 그래서 적절한 대응책을 고안해 내고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성과를 내는 데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항생제나 예방주사 등이 발견되기 전 사람들이 전염병에 의해 대규모로 죽어가던 시대적 한계 상황을 경제 대공황 앞에서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렸던 비극에 비유하여 적용시키고 싶다. 다행히 루즈벨트 정권이 진행한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의 여파를 미국 사회가 약간이나마 벗어났으나 지나치게 빠른 재정정책 축소로 1930년대 후반 미국은 다시금 경기침체를 겪는다. 만약 이때 미국 정부가 계속해서 과감한 재정정책을 쭉 이어나갔다면 조드 일가도 캘리포니아로 비극적 여정을 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경기침체가 다름아닌 2차사계대전 발발로 완전히 끝나고 미국의 참전으로 미국 사회 내 극심한 가난이 극적으로 해소된 것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바로 미국의 참전으로 자연스럽게 어떠한 이념적 저항 없이 정부 주도의 엄청난 규모의 재정정책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군수 물자와 무기 생산에 엄청나게 많은 돈이 투입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들을 거의 완전히 흡수하며 미국은 전후 유례가 없는 소비 폭발과 경제 호황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잘못된 직관적 통찰이 이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경제적 통찰도 갖고 있어서 조드 일가의 비극과 가난의 원인을 정부 정책 실패로 묘사했다면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당시 수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까지 미국 사회의 크게 여론을 흔들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적이지도 못하고 문학의 장점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문학의 힘과 문학의 한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서두에 언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균형 잡힌 좋은 독서 습관은 픽션과 논픽션을 적절히 섞어서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픽션에 치우친 독서도 논픽션에 치우친 독서도 균형 잡힌 교양과 폭 넓은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픽션은 감수성을 발전시켜 감성을 보다 세련되게 닦아주고 논픽션은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분노의 포도는 명성에 걸맞게 위대한 문학작품이며 나는 치킨에 맥주, 삼겹살에 소주가 어울리듯 이 작품을 읽는 것과 동시에 경제학적 상식을 키워주는 괜찮은 경제학 책도 같이 읽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문학의 힘과 문학의 한계 - 분노의 포도를 읽고 |작성자 포동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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