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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자료 그대로가 아니라 안 쓰는 게 맞다

국내 언론에 있던 때를 포함해 영어로 경제기사를 쓴 지 어느 덧 25년이 됐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필자가 한국의 경제 상황 및 한국의 기업 활동에 대한 기사를 영어로 쓰는 데는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어려움이 많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게다가 상황을 설명하는 논리 구성 자체도 두 언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고 지나고 보면 오역(誤譯)이라고 할 만한 경우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얻는 것도 많았다. 그 가운데 으뜸은, 취재하는 사건이나 사안의 전후 사정이나 구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최종 기사의 내용이 자칫 진실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어로 외국인들을 위해 글을 쓰다 보면 그 사람들 사고체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하는 것은 물론 다루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돼야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힘들고 한편으로는 그런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모국어인 한국어로, 그리고 사고 체계가 유사한 내국인들을 상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 사이에 아주 위험한 습관을 발견하게 된다. 기업이나 정부 부처에서 다소 생소하거나 복잡한 발표자료를 받았을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기사 가치 자체가 떨어질 경우에는 내용을 잘 모르면 기사를 보류한 채 정보원이나 전문가들에게 보충취재를 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발표 내용이 얼핏 보기에 중요한데 그 전개 상황이 얼핏 이해하기 힘든 경우다.

많은 기자들은 우선 급하게 기사를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기사는 내가 잘 모르니 선배가 맡아 주세요"라고 고참 기자에게 넘기기도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주변에서 흔히 "모르면 원문 대로 일단 쓴다"는 생각으로 보도자료를 스캐닝하듯 기사화하는 예를 여러 차례 보아 왔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십중팔구 기사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거나 발표문을 만든 사람의 "의도" 대로 기사를 쓰기 마련이다.

어제 금융위원회는 오래 기다려 온 "회사채 시장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자료 배포와 동시에 브리핑이 시작됐고 기자들은 이를 급히 보도했다. 그런데 자료는 전문가가 아니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것들이었고 자료의 구성도 명쾌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금전적 규모"를 파악하느라 발표자료를 뒤적였다. 그런데 6.4조 원이라는 대목이 등장했다. 많은 언론이 "정부가 회사채 시장에 6.4조 원을 긴급투입키로 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산업은행은 4조 원의 만기 회사채에 대해 차환용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들로부터 3.2조 원어치를 사들이고 이를 여러 경로로 시장에 되팔기로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 가운데 40%인 1.28조 원어치는 다시 금융업계로 되팔고 나머지인 1.92조 원어치만 신용보증기금 보증을 통해 유동화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따라서 정부가 책임지는 금액은 정확히 1.92조 원어치의 회사채이고 크게 보아도 산업은행의 인수분인 3.2조 원어치가 된다. 이날 자료에는 이런 절차가 그림으로 제시되긴 했지만 각 단계별로 금액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결국 보도자료에 나온 대로 보도한 기사는 오보이거나 기껏해야 애매한 기사가 되고 말았다. "모르면 보도자료에 있는 대로 쓴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모르면 쓰지 않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