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터통신 동료 기자인 장태민 기자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초점) 한은 총재 교체시점에 나오는 과감한 주장, 그리고 전문가적 포퓰리즘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한 달 남짓 남은 가운데 향후 중앙은행 수장은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과격한' 주장 가운데 한은이 물가안정목표제를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물가도 오르지 않고 물가안정목표의 하단을 장기간 하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화정책이 낡은 관습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회 청문회를 감안할 때 새로운 중앙은행 총재 취임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는 얘기들도 나오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에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총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 물가안정목표제에 대한 비판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불확실성 시대,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 및 과제'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한은은 과거 물가안정목표제를 제대로 시행한 적도 없으며 지금은 물가안정목표제의 폐기를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한은이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았던 물가안정목표제에만 안주하는 것은 자칫 타성에 젖은 통화정책을 위한 면죄부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은행에 '디플레이션'이라는 말은 금기용어가 됐지만 향후 한국경제가 디플레이션 경제로 전환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게 그의 관점이었다.
물가상승률이 추세적으로 둔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취하고 있는 통화정책의 준칙은 문제가 많으며, 그나마도 한은이 준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페널티 존을 설정했다면 지금의 한국은행 통화정책은 야단맞아야 한다"고 밝혔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에도 못 미치는 기간이 오래되고 일부에선 한국의 성장세 둔화가 일본의 전철을 밟은 수 있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디플레이션 우려가 심심찮게 나온다.
숭실대학교 윤석헌 교수도 "(중앙은행에 대한)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만 강조할 시기는 지났다. 디플레이션 큐어러(CURER)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비판자들은 소비자물가가 물가관리목표 하단인 2.5%를 밑돌고 있는데도 한은이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에게 물가안정 외에도 복수의 목표를 주는 분위기가 확연해졌다. 한국은행 역시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이라는 책무도 떠안았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새로운 총재를 맞이하게 되니 사람들의 요구사항이 다양해진 분위기다.
▲ 한은 역할 변경 요구하는 목소리들..'독립성'보다는 '중립성' 추구해야?
향후 한국경제 성장세가 더 둔화되고 디플레이션 가능성도 있는 만큼 통화정책이 경기부양, 물가상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들도 보인다.
또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대 흐름이 바뀐 점, 총재 교체시기라는 특수성 등을 이용해 그간의 중앙은행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도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주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말에 굉장한 거부감이 든다"면서 정부와 한은은 협조하고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햇다.
세계적으로도 선진국 중앙은행 등이 성장을 뒷받침한 가운데 한은이 기존의 안정지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나오는 것이다.
또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언어유희일 뿐이며 중앙은행의 '중립성'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라는 양대 축으로 움직이는 게 현실이고 따로 놀 수도 없으니 중앙은행 독립성이란 표현은 '선정적'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한은 독립성 보장이 한은에게 진공상태에서 존재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며 "시장과 정부 등 다양한 그룹의 이해를 어디에도 포획되지 않고 중립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신뢰를 쌓으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 총재 교체시점에 많아진 한은에 대한 요구..전문가 집단의 포퓰리즘?
중앙은행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면 정부는 성장에 집착할 수 밖에 없으며 단기간에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를 제어해야 하는 게 중앙은행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설득력을 얻는 지점도 여기다.
하지만 시대 환경이 변하면 중앙은행의 역할도 변한다. 문제는 시대 상황이 변했다고 급격하게 중앙은행의 역할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는 데 있다.
또 사실 한은이 물가만 신경쓰는 조직이라는 것도 오해다. 한은은 물가, 성장, 금융, 부동산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움직이는 조직이다. 성과 평가를 떠나 물가안정은 그간의 최우선 목표였을 뿐이다.
얼마전까지 금통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대식 한중금융경제연구원장은 "물가안정이란 인플레이션 뿐 아니라 디플레이션도 없는 상황을 의미하므로 물가안정목표제가 성장을 도외시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부에서 향후 고령화 등 사회구조의 변화로 저성장,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그는 "그런 가능성도 있지만 인플레이션 우려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고 했다
물가안정목표제를 폐기하는 게 최선이 아니라 이를 개선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게 김 원장의 판단이다. 그러면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금리인하에 대해서도 명백히 반대했다.
김 원장은 "현재의 우리경제는 위기관리국면보다 위기청산국면에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정책금리를 인하하는 것은 효과도 없고 구조조정만 지연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앙은행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 직원들은 새로운 수장이 누가 올지에 대해 긴장하면서도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조직을 흔들 가능성을 우려하기도 했다.
한은이 해온 일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지만 '전문가의 탈을 쓴 포퓰리즘'도 경계했다.
예컨대 물가가 2.5% 하단을 상당기간 밑도는데 금리를 적극적으로 안 내렸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면서 한은이 '준칙'을 어겼다는 식의 말만 하는 사람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은의 한 베테랑 직원은 "중앙은행은 경제주체들이 흔들릴 때 중심으로 잡아야 한는 곳이며 무엇보다 물가, 환율 등과 관련된 통화가치 안정을 책임지는 곳"이라고 했다.
이 직원은 단순히 소비자물가 하단을 운운하면서 한은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계했다.
그는 "소비자물가 타깃팅을 내건 것은 이를 무조건 고수하는 의미가 아니다. 통화가치 안정을 강조한 것"이라며 "중앙은행은 정부와 국민의 중간에 서서 신뢰성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 조직"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화가치 측정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또 단순히 물가상승률이 1%라는 수치만 봐선 안된다. 지금은 저인플레이고 디플레이션 상황이 아니다. 디플레이션을 문제삼으려면 임금상승률 같은 것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임 한은 총재는 지금의 주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을 학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통화가치 안정에 대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 오길 기대했다.
(편집 임승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