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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지식 여행에 꼭 필요한 지침서

지난해 이맘때쯤 약 2주일간 이탈리아 패키지여행을 다녀왔다. 나로서는 장기간 여행이었고 패키지여행은 처음이었다. 패키지여행의 단점은 알고 있었지만, 아내와 함께 오붓하게, 마음 편하게 여행하자는 취지에서 패키지를 택했다. 자유여행보다는 준비하거나 지리, 교통 정보 등을 미리 익혀야 하는 부담도 없고 좋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여행 자체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오래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아서 여행 안내서를 구해 읽었다. "저스트 고 이탈리아"였는지 "프렌즈 이탈리아"였는지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책은 충실했고 주요 여행지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어서 재미도 있었다. 여행 도중 방문지 도착 하루 전에 다시 훑어보는 등 큰 도움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코노미스트 중 한 분이며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홍춘욱 박사의 책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로크미디어, 2019.04.24》을 소개하려고 시작한 이 글에서 뜬금없이 이탈리아 여행담을 늘어놓은 것은, 이 책이야말로 위에 언급한 여행안내서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광스럽게도 저자로부터 직접 책을 선물 받고 단숨에 읽겠노라 마음먹었지만 다른 일정과 여행 등으로 뒤늦게 읽게 됐다. 읽는 내내 감탄하며 책 소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미 시중에는 이 책에 대한 상세한 소개 글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소개 글이 어찌나 뛰어나던지 소개 글을 써야겠다는 나의 의지는 쉽게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느꼈던 저자에 대한 고마움은 표시해야겠다는 생각과 이 블로그 독자들께만이라도 책 소개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다시 내기로 했다.

이 책의 저술 의도는 저자가 서문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는 "세계 역사를 바꾼 중요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중략) 영웅의 행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사의 이면도 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평소 나눈 대화를 통해 저자가 통계와 실증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 말의 뜻을 얼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의 본문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하듯 저자는 역사를 바꾸어놓은 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상황을 주로 돈, 즉 금융 상황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어서 음모론이나 공허한 정치공학적 설명을 싫어하는 나에게 얼른 와닿았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던 영국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결국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금리에 정부가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금리가 낮았던 데에는 명예혁명 이후 영국 정부가 한 차례도 이자와 원금 지급을 어긴 적이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돈을 떼일 염려가 없으니 정부가 국가를 위해 돈을 빌릴 때 국민과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율보다 높은 금리에 기꺼이 돈을 빌려준 것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프랑스는 역사도 오래됐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유럽에서 번번이 최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된다. 프랑스 왕실은 이자와 원금 지급을 자주 어겼으며 금리는 상대적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삼국지 이후 중국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혁신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글에도 잘 나와 있지만, 도시가 위축되고 시장이 사라지면 혁신은 사라진다. 아무리 분업 등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른 품질을 유지하며 제품을 만들어낸들, 이 제품을 살 시장이 없다면 혁신의 싹이 틀 수 없다"고 한 저자의 설명은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는 시장은 이미 실패했고 언제나 부패의 온상이므로 규율의 대상, 처벌을 위한 감시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가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더 그렇다.

히틀러의 부상이나 대한민국의 1997년 외환위기 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저자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분석적이다. 물론 금융만으로 세계적인 사건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통화 금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글 앞부분에서 나는 이 책이 여행안내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행지를 직접 답사하거나 체험한 저자가 성실하게 여행객들에게 길잡이를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쓴 여행안내서야말로 제한된 시간과 비용으로 여행을 충실하게 마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여행안내서만 읽고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보의 가치는 반감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통화, 금융 및 거시경제에 관심 있고 그 분야에 대해 더욱 전문적인 저술을 읽고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지침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 책만 읽는다고 나머지 여정을 생략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지침서는 방향을 제시하고 지름길과 정보의 소재를 알려준다. 여행을 체험하는 것은 여행객 본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저자의 노고와 책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어떤 차원이든 내 소개 글이 불편함을 끼쳤다면 이는 전적으로 내 글솜씨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단한 책이다. 저자의 후배들에 대한 애정과 친절이 듬뿍 담겨 있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