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학한림원은 지난 2024년 2월 전문가들로 구성된 반도체특별위원회를 발족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해 정확한 전략과 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지난해 12월 결과 발표회를 개최한 데 이어 이번에 「K-반도체 이대로라면? 이렇게해야!」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서문에서 위원회는 "과거 우리가 누렸던 기술적 우위는 점차 도전받고 있고, 새로운 기술 영역에서는 치열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라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엄중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AI 물결은 새로운 기회의 땅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위원회는 밝혔다.
제1장(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이대로면 무너진다)은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 분업화·협력화 시대의 글로벌 공급망지형, 반도체 산업 치열한 경쟁으로 돌입,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위험하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2장(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이렇게 해야 생존한다)은 대한민국 반도체 제조 지켜야 한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해야 한다, 새로운 시장기회를 잡아야 한다, 인재유인과 유입이 필요하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현재 상황과 전 세계 경쟁국 및 경쟁사 현황,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후들, 그리고 이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본 블로그에 추천한다. 다만, 반도체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모임인데 정작 삼성전자는 빠져 있어서 읽기 전부터 다소 기대감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내용 면에서도 현황 분석과 경쟁 상대 동향 소개 등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리돼 있는 것으로 보여서 큰 도움이 됐으나, 대한민국 자체의 문제 진단은 다소 상투적이며, 업체들의 판단 착오나 경영 실패 등을 지적하고 그 악영향을 강조하는 부분도 미약해 보인다.
또한, 학술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인데 기본적인 한글 문법이나 띄어쓰기가 맞는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 꽤 많아서 아쉬웠다. 인용된 통계도 오래 지난 경우가 많았는데, 내용에 따라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산업계 상황을 고려하면 가급적 최신 통계를 소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본 블로그에서는 보고서 내용 중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위기의 징조" 부분만 소개하고 보고서 전체를 볼 수 있는 링크를 맨 아래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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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entrepreneur.com) |
위기의 징조 ① 기술경쟁력이 평준화되었다.
지금까지 초격자 기술력을 갖고 있던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술이 미국, 중국, 일본과 평준화되어 가고 있다. DRAM의 미세화 기술은 한계점에 봉착하여 기업별 기술 수준의 순위는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은 DRAM 미세화 기술이 평준화되었고, 중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NAND 기술도 단수의 차이가 없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웨스턴디지털, 키옥시아 등은 이미 단수의 차이는 없고 후발주자인 중국의 YMTC도 이에 유사한 수준의 NAND 기술을 확보하여 생산 중이다.
위기의 징조 ② 선도적 투자 경쟁력을 잃어간다.
이제는 모두가 신규 투자를 하는 시대로 진입하여 투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타국보다 먼저 대규모 투자를 하여 경쟁력을 높여온 나라인데, 이제는 모든 국가가 선제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TSMC는 각국의 지원으로 전 세계에 첨단 제조시설을 구축하고 있고, 마이크론은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미국에 신규 투자를 시작했다. 키옥시아는 기업상장과 일본 정부의 보조금으로 신규 투자를 계획하고 있고 YMTC와 CXMT는 지속적인 중국 정부 지원으로 신규 투자를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은 신규 투자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장점은 없어졌다. 그동안 대한민국 메모리반도체 산업이 신규 투자로 경쟁력을 주도할 때 20년 동안 미국, 일본, 유럽은 신규 투자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모든 국가가 신규 투자를 하고 있고 투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타국은 투자 재원 일정 부분은 정부가 지원하고 있어서 기업들의 투자 동력이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 기업은 타국의 정부 지원만큼 투자 동력이 상실되어 선제적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흐름은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어 투자를 못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결국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급격히 위축될 위험성이 높은 실정이다.
위기의 징조 ③ 제조 기반 산업인 소부장 산업은 취약하고, 신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팹리스, 패키징 산업은 성장 기반이 미약하다.
제조공정(소자 대기업) 역량은 우수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기반 기술(소부장, 설계) 경쟁력은 미흡하여 공급망 자국화 시대에 기반기술 미흡이 제조 산업 경쟁력의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새롭게 도약하는 패키징 분야도 취약하며 취약 분야인 팹리스(설계), 패키징, 소부장 기업 육성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책 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기반 산업이 취약하고 성장 산업은 미약하며 공급망의 불안정성이 크다.
위기의 징조 ④ 인재들이 말라간다.
인재 유인에도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출산율 저하와 의대 선호 현상으로 반도체 산업으로의 인재 유인이 힘든 실정이며 산업의 인재 수요는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을 선호하는 학생들은 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재들을 유인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며 나아가 해외 인재의 적극적 유치도 필요하다. 전 세계 기술 인력 확보 경쟁 속에 기술 인력 유출도 심각하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인재의 부족이 심각하며 한국 내의 인재들이 중국으로의 유출에서 미국, 일본, 유럽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런 인재 유출을 방지할 수 있는 특단의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위기의 징조 ⑤ 전력·용수와 같은 필수 인프라 구축이 어렵고, 민원이 해결되지 않는다.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는 전력, 용수 등의 안정적 공급이 전제되어야 하며, 대규모 제조시설 투자 시 인프라 시설 구축에도 많은 비용과 기간이 소요된다. 현재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전력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의 전력수요는 2029년 0.4GW를 시작으로 점차 증가하여 2042년 이후 7GW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며, 산단 조성과 기업투자가 마무리되는 2050년에는 10GW 이상의 전력수요가 예상된다.
전력은 반도체 제조에 공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공급이 안 되면 제조시설을 운영할 수가 없고, 나노초 단위의 순간적인 정전에도 설계 및 팹 운영에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생산 손실, 클린룸 오염, 장비 고장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수리하고 최적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 특히 반도체 제조시설은 365일 24시간 운영되어야 하므로 전력의 안정적 공급이 필수이며 기후변화로 무탄소 에너지 사용에 대한 부담 또한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첨단전략산업 지원을 위한 전력망 인프라 구축 계획과는 별개로 국내 송배전망 건설 및 운영에 책임이 있는 한국전력의 부채 문제, 주민 수용성 문제로 인한 건설 지연 등으로 인하여 적기에 전력 인프라 구축이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또한 한전에서는 HVDC 송전선로 건설 비용을 최종 수요가(산단 입주 기업)에서 부담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향후 전기화 및 데이터센터 등으로 인한 전력수요 증대, 재생에너지 확대 등으로 인하여 송배전망 건설 및 투자 확대가 필수적인 상황 속에서 송배전망 건설 문제, 비용 부담 주체 문제 등은 지속적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용수 공급은 반도체 제조에 매우 중요하며 냉각 시스템, 세정 공정, 조립 및 패키징 공정에 사용되는 화학 용액 희석 등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용수 공급은 생산량을 결정하며, 생산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용수 추가 수요는 76.4만m3/일(대구시 생활용수 수준)로 대규모 추가 수요에 맞춰 단계적인 적기 공급시설 구축이 중요하다. 반도체 제조시설 운영 필수 인프라인 전력, 용수, 폐수를 기업이 주관하고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시설은 전기공급이 365일 24시간 중단없이 공급되어야 하고, 용수는 반도체 제조공정에 필수적인 소재이고, 폐수처리시설이 있어야 오염원을 배출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인프라를 해외의 경우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국내기업의 제조원가에 부담이 발생하여 원가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
또한 민간에서 인프라 구축을 주관할 경우 각종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민원이 발생했을 경우 신속한 대처가 어렵고 이로 인하여 사업 추진이 늦어지게 된다.
인프라 구축 인허가 지연 및 지역 주민의 민원 등으로 인한 투자 지연이 지속 발생하게 된다. 전기공급은 태양광 또는 원자력과 같은 발전원과 반도체 제조시설 사이의 이동 거리로 인하여 송전망이 필요한데, 이러한 송전망의 구축에 경유하는 지역의 민원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지연이 발생한다. 용수도 마찬가지로 수원과 제조시설 사이에 거리가 존재하여 전기와 같은 민원이 발생하게 된다. 민원이 발생하면 해당 기업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이런 민원 해결 시간으로 인하여 경쟁력 저하되고 산업 경쟁력에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할 수 있다.
위기의 징조 ⑥ 중복되고 불필요한 위한 규제로 인하여 국가와 기업의 비용만 높아진다.
중복되고 불필요한 규제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활동으로 비용은 증가하고, 속도는 느려지게 된다. 환경, 안전과 같은 규제는 국가적,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규제이나 중복되는 규제 항목으로 인하여 국가 및 기업에서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안전과 관련하여 산업안전보건법에 명확히 안전에 대한 법적 규제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대재해만을 따로 규정한 중대재해 처벌법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고 이는 명백히 중복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환경 관련 법안인 화학물질관리법에서 환경과 관계없는 안전 관련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복되고 이로 인하여 국가와 기업의 비용과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법제정의 취지에 맞는지와 이와 유사한 내용의 법안을 비교하여 효율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체벌만을 위한 규제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의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법의 제정과 운영은 법취지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는지, 단순히 중대재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체벌을 위한 법이 아닌지가 검토되어야 한다. 또한 화학물질관리법안의 내용이 법제정의 취지에 맞게 되어 있는지와 과도한 규제가 있는지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법의 운영에 국가도 비용이 발생하고, 기업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비용이 발생한다. 국가의 비용은 국민이 부담하여야 하고, 기업이 비용은 원가상승으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민의 삶과 기업의 경쟁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므로 국가적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국민의 세금이 새고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이를 입법한 국회가 져야 할 것이다.
위기의 징조 ⑦ 대한민국 비밀병기 부지런함이 없어진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선배들의 성실함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반도체 산업 종주국인 미국, 일본에 비하여 거의 20년 늦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종주국보다 더 좋은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선배들의 부지런함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루 16시간 가까이 근무하며, 후발의 한계를 극복하였고, 결국 종주국을 앞설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대한민국 반도체 역사에 20년은 후발, 이후 30년은 선발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주도했다. 선발이었던 30년 동안 미국, 일본, 유럽 등 반도체 종주국은 우리의 부지런함을 이기지 못하여 반도체 제조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종주국이 반도체 제조를 다시 시작하였고, 우리도 50년 전의 부지런함이 사라지며 더 이상 반도체 제조의 경쟁력을 유지 못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현장에서는 정책적으로 부지런함이 없어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주 52시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30분만 더하면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퇴근하고 다음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낭비가 발생하고 요즘같은 시기에는 전쟁 중에 퇴근하는 군인들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똑똑함과 부지런함을 함께 겸비해야 경쟁력이 되는 국가인데 우리의 경쟁력을 우리 스스로가 퇴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