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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민주주의 제도가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 저명한 경제역사학자인 해롤드 제임스가 Project Syndicate에 기고한 『Democracy Versus Growth?』라는 글을 소개한다. 약간의 의역이 있음을 밝혀 둔다. 기고문 영문 원문은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Harold James

Harold James is Professor of History and International Affairs at Princeton University, Professor of History at the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Florence, and a senior fellow at the Center for International Governance Innovation. A specialist on German economic history and on globalization, he is the author of The Creation and Destruction of Value: The Globalization Cycle, Krupp: A History of the Legendary German Firm, and Making the European Monetary Union.




Democracy Versus Growth?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정부 제도 가운데 경제 발전에 어떤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한 해묵은 논의가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일고 있다. 인기 없는 정책을 밀어부칠 수 있는 권위주의 정부 제도가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더 효율적일까, 아니면 견제와 균형 원리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가 물질적 번영을 이룩하는 데 더 적합할까?

지금껏 수십년간 이 두 제도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번갈아가며 제시됐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 치하에서 칠레가 1980년대에 이룩한 경제 발전이나 리콴유 치하의 싱가프로가 이룩한 경제 발전은 실로 놀랄 정도였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선진국들이 경기침체와 불황과 싸우고 있는 모습은 실로 이와는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유럽에서는 "유럽동맥경화증"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 제도아래에서는 특수 이익집단들의 간섭으로 성장이 영향을 받을 위험이 크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 권위주의 정부 제도를 채택한 국가의 경우 경제의 장기적 성공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깨지게 된 사건이 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였다. 이어진 동유럽의 공산주의 몰락 및 중앙계획경제 제도의 붕괴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유권자들은 현실적이고 부패 소지가 없는 개혁 프로그램을 위해서라면 일시적인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중·남미에서는 좌파 정치인들조차 시장경제 원칙을 도입했고 그에 이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199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논란은 재점화되기에 이른다. 중국의 초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권위주의 제도가 가진 강점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07-2008 세계금융위기를 큰 피해 없이 넘기는 모습을 보인 중국공산당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중국식 모델을 따르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터키의 레셉 카입 에르도간,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그리고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같은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의 중단은 경제적 안정 및 성장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로 위기가 끝을 보이지 않자 유럽에서도 이런 시각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현재 유럽집행위원회 의장인 장-클로드 융커는 유로 위기가 시작되자 "우리는 할 일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뒤 재선되는 방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다. 2010년 5월 유럽 지도자들은 그리스에 대한 개혁 압박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단순한 자금 공급자로서가 아니라 사실상 그리스에 대한 벌칙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독일 재무장관은 심지어 최근 프랑스의 의회가 개혁 추진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하도록 누군가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낫겠다고 발언해 논란을 불러왔다.

나는 단기적인 시계에서 보면 권위주의 정부 제도가 무책임한 정책을 배척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책임 소재가 모호한 권위주의 정부 제도 아래에서는 결국 부패와 비효율의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으며 중국도 바로 이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민주주의 정부 제도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면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1990년대에 동유럽 각국에서 쉽지 않은 개혁 방안을 국민들이 지지한 것은 바로 유권자들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일정 부분 희생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 주는 사례다. 이런 논리에 비춰 보면 그리스에서 유권자들이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 생각에는 다른 방안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의회의 행태다. 의회 내 토론을 통해 장기적인 정책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방식은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이 한 번 결정된 정책에 대해서까지 사후 땜질식 수정을 가한다든가 일부 철회하는 등의 구태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미국 대공황 이후 수입 장벽을 과도하게 높여 문제를 악화시킨 책임은 미국 내 의회에 있다는 결론이 사후에 내려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무역 정책의 경우 유권자들의 단기적 압력에서 보다 자유로운 대통령에게 결정권을 주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럽의 경우에도 재정정책의 큰 틀에 대해서는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전략을 놓고 공개적인 토론을 거친 뒤 역내 전체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단 결정이 내려지만 회원국들이 집행을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책임질 권한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기관에 명확하게 위임될 필요가 있으며 이들은 갑작스런 변경 요구에 휘둘리지 않도록 권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이 보다 지속가능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 대안으로 권위주의 정부 제도를 채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냉철한 토론과 검토의 전통이 현재 진행중인 위기에 대한 흥분된 반응 때문에 퇴색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것이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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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project-syndicate.org/commentary/democractic-authoritarian-growth-by-harold-james-20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