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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칼럼) 재벌 중심 기업생태계 혁신 없이는 세계적인 혁신기업도 없다

(※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 센터장님이 『나라경제』 11월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지난 2년간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러 여기저기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그러면서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어려운 왜곡된 한국 기업생태계에 아쉬움을 갖게 됐다. 특히 수많은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기회를 앗아가는 대기업들의 내부거래 관행이 안타깝다.

어떤 대기업에 글로벌시장에 내놓고 경쟁해야 하는 하드웨어제품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 제품을 개발하고 인터넷에 연결해 서비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클라우드(cloud) 서비스는 IT 관련 계열사에서 만든 것만 써야 하고, 그 콘텐츠를 올릴 통신망도 계열통신사의 것만 써야 한다면 어떨까. 또 핵심부품이나 배송·물류, 광고·마케팅, 사내 업무 소프트웨어도 모두 관련 계열사의 것만 써야 한다면 어떨까. 각 분야에서 최고로 잘하는 회사들의 서비스를 써서 제품을 만드는 해외 경쟁사에 대항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제품의 원가가 높아진다. 제품의 경쟁력도 떨어진다. 계열사끼리의 비즈니스는 결국 거저먹는 장사라고 생각하고 더 잘하려는 노력도 안 할 것이다. 해외 같았으면 이런 방식으로 경영하는 회사는 일찌감치 경쟁에서 밀려 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해도 그동안은 먹혔다. 덩치를 키워 그룹의 물량만 내부에서 소화해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계열회사를 통해 외부소프트웨어 등을 구입할 때는 갑을 관계를 이용해 최대한 가격을 깎아 오히려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룹 임직원들에게 경쟁사 제품을 쓰지 못하게 하고, 계열사 제품을 그룹 임직원과 가족에게 강매하는 경우도 있다. 그룹 대표상품을 만드는 핵심회사는 이렇게 해서 국내시장을 장악했고 여기서 얻은 힘을 바탕으로 해외에는 국내보다 더 싸게 제품을 팔아 시장점유율을 높여나갔다.

이렇게 성을 쌓은 성주들 입장에서는 왕국의 규모를 크게 키우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일단 성의 규모가 커지면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중요했다. 각종 사업권, 면허를 정부로부터 얻고, 독점시장에 경쟁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의 틀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카르텔을 언론이 문제 삼지 않도록만 하면 웬만해서는 이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한국의 대기업 위주 기업생태계가 작은 물고기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는 것이다. 작은 회사들은 대기업과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대기업을 상대로 판로를 개척한다고 해도 대기업 IT계열사들을 통해 을이나 병의 관계로 값싸게 간접적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팔게 된다. 당당하게 자신의 제품을 갖고 대기업과 파트너십을 가져간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다. 오히려 거래 중소기업이 잘되는 것 같으면 거래단가를 깎거나 계약을 파기하는 방식으로 견제한다.

이런 불공정한 거래, 카르텔구조를 깨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실리콘밸리에서 보는 것처럼 작은 기업들이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만을 갖고 급성장하기란 참 힘들다. B2B시장은 막혀 있고 B2C시장의 많은 길목도 대기업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수많은 기업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집중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성장하는 혁신 중심 기업생태계를 갖고 있다. 우리와 기업생태계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만 해도 일찍이 재벌이 해체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성이 존재하는 기업생태계를 갖고 있다.

한국의 이런 재벌 중심 기업생태계와 문화가 좀 바뀌어야 진정한 창조경제가 이뤄질 수 있다. 창업을 독려하는 것만큼 공정한 시장을 위한 정부의 감시자 역할도 중요하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정책으로 수많은 혁신을 유도하고 최고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쟁시켜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적인 혁신기업이 나올 수 있다. 정부의 분발을 촉구한다.
  •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 센터장 estima7@gmail.com
  •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 흥미로운 스타트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개하는 것이 취미. 전 조선일보 기자, 전 라이코스 CEO. 테크블로거로 ‘에스티마의 인터넷이야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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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한국 정치권에서 이른바 경제민주화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선거 공약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그것이 재벌 해체를 궁극의 목표로 하는 것인지 재벌의 소유 및 경영 행태를 개선하자는 것인지 애매하다. 사실 재벌이 한국 경제에 기여한 공이 큰지 피해를 끼친 과가 큰지 토론을 하자고 하면 끝이 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분명한 것은 현재 한국 기업활동에 있어서 불합리한 일이 많으며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재벌 기업이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꼭 재벌 구조 해체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재벌 구조를 하루아침에 해체할 현실적 방법도 없으며 그것이 꼭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이든 누구든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지속한다면 기존 법률과 원칙으로도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얼마든 있다. 눈에 보이고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은 채 계속 거대 담론만 가지고 논란만 하는 것은 혹시 이를 바로잡지 않는 데서 오는 대가를 챙기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재벌이든 아니는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한꺼번에 못하면 하나씩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