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지역에 있는 노갈레스라는 지역과 한반도는 모두 오랜 기간 하나의 지역이었으며 동일한 인종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하나의 문화를 일구고 살아 왔다. 하지만 노갈레스는 둘로 나뉘어 한 쪽은 미국에, 다른 한 쪽은 멕시코에 속하게 됐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돼 북한과 남한으로 나뉘어졌다. 노갈레스와 한반도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한 쪽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반면 다른 한 쪽은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갈레스와 한반도는 그 밖에 공통점이라곤 별로 없다. 기후도 다르고 지리적 여건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왜 한 쪽은 부유해졌으며 다른 한 쪽은 실패했는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대런 에이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노갈레스와 한반도를 포함해 발전에 성공한 나라들과 실패한 나라들의 사례를 깊숙히 연구해 분석한 결과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요인들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Why Nations Fail (부제: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라는 책에서 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참여형(inclusiveㆍ번역서에는 '포용적'으로 번역된 경우도 있음) 제도가 자리잡고 있느냐의 여부다. 대중의 절대 다수가 각자의 재능과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고 개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장려하고 있으면 그 사회는 참여형 경제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미국과 남한 등 경제 발전에 성공한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이다.
이와 반대로 기회가 있었지만 경제 발전에 실패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바로 그와 반대로 수탈형(extractiveㆍ번역서에는 '착취적'으로 번역된 경우도 있음) 제도가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북한과 멕시코 지역으로 편입된 노갈레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수탈형 사회에서는 절대 다수가 가져가야 할 소득과 재산 증식의 몫을 극소수의 계층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빼앗아가도록 되어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결국 참여형 제도가 정착된 사회에서는 참여형 시장이 발달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재능에 가장 부합하는 직업을 추구할 자유를 갖게 되고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된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개인들은 이를 통해 창업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재능이 있는 근로자들은 자신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효율성 측면에서 뒤떨어진 기업은 퇴출되고 효율적인 기업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수탈형 경제 제도 아래에서는 모든 제도가 극소수 계층이 절대 다수의 경제활동으로부터 이루어진 결과물인 경제적 부를 독차지하도록 짜여져 있다. 이런 사회에서 절대 다수인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창출한 부를 자신들이 향유할 수 없기 때문에 점점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그런 사회는 갈수록 생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과거 중국, 북한, 구소련 등의 경우 집단농장 제도 아래에서 생산성이 현격히 낮아졌던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수탈형 제도가 자리잡은 국가의 경제 발전을 도와줄 때 외부로부터의 막대한 원조나 차관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와 관련이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UN의 원조가 어떻게 낭비돼 버리는지 잘 나타내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2001년 미국 주도 다국적군이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고 난 뒤 UN은 새로 들어선 정권에 원조를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 돈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UN과 다른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실어나를 비행기를 전세 내는 일이었다. 남은 원조금 가운데 다음으로 지출한 항목은 현지 차량 운전수와 통역 인력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드디어 남은 돈으로 오지 마을 재건에 사용될 목재를 구매했다. 하지만 다시 많은 돈을 들여 화물차를 전세 내야 헀다. 이 과정에서는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사업가가 계약을 따내게 됐다. 즉 이 과정까지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출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구매한 목재는 주민 참여가 없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막상 현지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크기와 규격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결국 주민들 주거시설 건축용으로 구매한 목재는 땔나무 외에는 쓸모가 없게 됐다.
정리해서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보자. 전체 금액 가운데 우선 20%는 제네바에 있는 UN 관계기관 사무실 경비 등으로 쓰였다. 다음 남은 돈의 20%는 이번 일을 실제 추진하기로 결정된 브뤼셀 소재 NGO가 역시 사무실 유지비 등 일반 경비로 떼어갔다. 그 다음으로도 3차례나 다른 절차를 거치며 일반 경비로 남은 돈의 20% 정도씩을 매번 떼어갔다. 그 나머지 작은 금액이 실제 집행에 투입됐다. 하지만 남은 적은 돈으로 구매한 목재도 사실 현실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원조나 외국의 도움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혜국의 경제 및 사회 제도를 참여형으로 변화시키도록 하는 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물론 참여형 경제 제도를 갖춘 나라라고 영원히 경제 발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참여형 경제 제도에도 불구하고 정치 제도 및 여타 사회 구조가 참여형 제도의 특징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 지속적 발전은 보장된다고 보기 힘들다. 정치 제도가 낙후된 경우 참여형 경제 제도가 자리잡았다고 해도 지속적인 생산성 개선과 경제 발전을 이루기 힘들어질 수 있다. 실례로 창조적 파괴라는 과정은 기술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든 창조적 파괴의 피해자는 기득권층일 수밖에 없다. 만일 정치 및 사회 제도가 효율적이지 못하다면 기득권층은 국가 발전보다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데 집중하게 되고 창조적 파괴 과정을 방해하는 데 자신들의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술 발전은 불가능하고 경제 발전도 지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본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는 『How Asia Works』(☞ "(책소개) How Asia Works: 왜 한국은 성공했고 동남아시아는 실패했나?" 참조)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참여형 제도와 수탈형 제도의 차이를 강조하느라 다소 반복적인 설명을 하는 듯한 인상도 준다. 저자들은 사회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느라 보다 많은 국가의 보다 많은 사례를 소개하느라 그랬겠지만 원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부분적으로 건너뛰면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