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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원화 절상보다 절하를 더 걱정해야 하는 이유

일본 엔화 가치의 급락이 일시적이 아니라 추세적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각종 언론 보도와 시장 전문가들 분석 보고서가 쏟아지고 있다. 일본과는 역사적 지리적 인접성을 제외하더라도 주요 수출시장에서 한국의 많은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그처럼 높은 관심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겠지만 일부 언론의 보도 내용을 보면 지나치게 표피적인 수준에 그친 것으로 보여 아쉬움을 갖게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5년간 지속되고 있는 고질적인 디플레이션 상태를 탈피하겠다고 야심차게 대대적인 통화팽창 정책을 도입한 이후 엔화 가치는 평균 기준으로 지난해 9월과 올해 4월 사이에 달러에 대해 20% 하락했다. 시장환율은 급기야 달러당 100엔을 돌파한 뒤에도 쉬지 않고 하락을 지속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적지 않은 국내 언론은 이를 "엔저의 공습"이라는 등의 표현을 써 가며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는 한국 수출기업이 입을 피해를 부각시키고 있다.

쉽게 생각하면 엔화 가치가 떨어질 때 일본 기업들, 예컨대 도요타자동차 같은 기업들은 달러 표시 가격을 20% 할인해 수출해도 엔화로 환산한 매출액에는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결국 판매가 늘면서 수익은 늘어나게 된다. 결국 그와 경쟁 상태에 있는 한국 기업들, 예컨대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 달러 표시 가격을 덩달아 인하하든지 아니면 시장점유율을 일본 기업에 내 줘야 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수익은 대폭 감소하게 된다.

◇ 통화전쟁에 동참하라?

이러한 보기 드문 엔화 가치 하락에 대한 경고성 논평을 내놓는 언론이나 전문가들의 경우 한국 정부도 원화 절하를 유도하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도 통화가치의 경쟁적 하락을 도모하는 이른바 "통화전쟁"을 회피하거나 비아냥거리는 것에 그치지 말고 적극 대처하거나 동참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는 한국의 입장에서 이같은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G7 경제국이며 엔화는 중앙은행 외환보유고 비중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세계 4대 기축통화이다. 또한 일본은 15년 여의 긴 기간 동안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정부부채를 대부분 국민들이 보유하고 있다. 한편 최근의 엔화 약세는 엄연히 원화 강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그에 따라 대처하는 방식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9월과 올해 4월 사이의 같은 기간 원화의 달러 대비 가치는 평균 기준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 정부가 일본과 같은 수준의, 어쩌면 그 이상의 통화완화정책을 펴지 않는 한 엔화 가치 하락에 맞먹는 원화 가치 하락을 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그와 같은 원화 가치 하락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 한국은 처지가 다르다

한국은 대외채무가 외환보유고의 157%에 달했던 2008년보다는 많이 낮아졌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6%에 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단기외채의 보유고 대비 비중은 2008년 80%에 육박하던 것이 최근 40% 아래로 떨어져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흥국 기준으로는 높은 편이다. 또 장기외채로 분류되는 경우라도 금융시장 혼란기에는 중도회수 요청을 받을 수도 있고 더구나 국채 투자자의 경우 매도에 나설 수 있다. 따라서 해외 금융시장 혼란기에는 원화가치의 급락과 이로 인한 투자자 이탈이 다시 원화 하락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겪을 수 있다.

더구나 원화 약세로 인해 수출기업을 지원하면 수출기업은 국내투자와 고용을 늘리고 국민소득을 증진시키는 선순환구조는 이미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휴대전화의 경우 이미 80% 내외를 해외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자동차도 현대자동차의 경우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업종의 경우 수출이 늘어도 국내투자와 고용에 기여하는 정도는 과거보다 훨씬 낮아졌다.

또한 원화 약세는 국내 물가, 특히 에너지 물가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크다. 게다가 지난 대통령선거 때에도 목격했듯이 국민들은 수출 실적보다는 물가 움직임에 훨씬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과 더불어 국내 서비스업의 경쟁력 향상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 박근혜 정부로서는 꾸준히 국내 물가 안정과 내수산업 부양에 경제정책의 중점을 두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도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달러 상승시에 대비해야

게다가 우리에게는 전세계 신흥국 및 선진국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고질적 리스크가 있다. 바로 북한이다. 올해 초 북한의 핵실험과 유엔의 제재 강화, 그리고 그에 대한 북한의 전쟁 위협 등 일련의 사태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원화는 쉽게 몇십 원 상승했다. 만일 우리가 엔저에 대응하기 위해 원화의 대폭적 절하를 추구했더라면 북핵 사태의 영향을 훨씬 더 크게 나타났을 수도 있다.

이제 엔저 현상은 원유가격처럼 우리에게는 변수라기보다는 상수가 되어 버렸다. 경계감을 갖고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우리 경제에 반사이익을 추구하는 지혜를 짜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백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대책도 없고 실체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없는 공포심 조장에 편승하려 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서히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더 있다. 필자는 현재 몇년 동안 약세를 보이고 있는 달러화의 가치가 미국 경제의 회복세 가속화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통화정책 전환 준비에 따라 강세로 돌아설 것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경제 회복세로 에너지가격이 상승전환하고 달러화 가치도 회복되기 시작하면 한국의 수출은 회복될 지 모르지만 국내 물가는 급격히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섣불리 원화 약세를 도모하기보다는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경제 상황의 변화를 잘 살펴보고 이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실질실효환율 추이, 톰슨로이터데이터스트림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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