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과 국민이 지표상 내수와 투자부진만을 인식하고 펀더멘털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재고 증가율이 크게 축소되는 등 경기회복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최근의 급락세를 보일 정도로 펀더멘털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
위에 열거한 인용문은 어느 모로 보나 서로 같은 내용이고 물론 금융시장이 불안한 가운데 정책당국자가 투자자들의 심리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랄 만한 것은 이 가운데 두 건의 발언은 우리나라가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할 만한 외환위기를 맞았던 1997년에 나온 것이고 하나는 최근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하나는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불과 3-4일 전에 나온 발언이다.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당국자라면 하루하루 금융시장 상황에 민감하게 휘둘릴 수 밖에 없는 투자자들과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안정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그렇지만 시장이 일제히 하락하고 투자자들과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와중에 안심하라는 말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요즘은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일반 국민들도 공식적인 금융 및 경제정보는 놀랄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이제 10년도 넘게 지난 오늘날, 더구나 한국 금융시장은 이제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 자본 이동은 이른바 경제 펀더멘털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투자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위치에 있고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제는 한국의 관료들도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및 해외 금융시장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요인들로 주도되고 있는지, 국내 및 세계경제가 어떤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나라는 단기적으로는 어떤 개선을 이뤄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기획재정부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자료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양적완화 조기종료 이슈 관련 10문 10답』이라는 제목의 이 자료(☞ 바로가기)는 가장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사안들을 나열하고 거기에 대한 정부의 진단과 배경 통계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냥 "다 괜찮다"고 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과연 한국경제 펀더멘털은 양호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느 나라 경제도 완벽하지 않다. 즉 펀더멘털이 양호하다는 말은 이미 말이 아니다. 물론 거시경제지표는 과거보다 양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많은 취약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취약한 부분을 주시하고 여기에 한국과 한국 정부가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싶어하는데 아무도 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있다.
재벌대기업들은 여전히 언론을 "관리" 대상으로 여기고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경제와 담을 쌓고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금융기업들은 서민정서라든지 기타 정의되지 않는 개념들을 내세우는 정치권 및 규제당국의 간섭 아래 영업전략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디플레이션, 부동산시장 붕괴, 엔화의 뜬금없는 절상, 핵발전소 위기, 자동차 대량 리콜 등 무수한 악재를 극복해 나가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이에 따른 반사이익에 취해 구조개혁을 소흘히 해 왔다.
경제민주화가 정치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아마 주요 정당들은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고 재벌의 일부 관행에 대한 시정을 목적으로 입법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규제는 actor를 대상으로 해서는 안되며 action을 대상으로 하되 그 적용을 철저히 해야 한다. 대기업(actor) 은 전철역에서 몇미터 밖에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지를 규정할 것이 아니라 점포들 사이에 어떤 행위(action)를 규제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철저한 처벌을 한다는 확고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나는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이 양호하다고 믿고 싶다.
(1997년 10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