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6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끝나면

요즘 "응답하라 1994"라는 제목의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공중파 채널이 아니어서 지역에 따라 그런 것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도권이나 대도시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방송ㆍ연예계 종사자라면 이 현상을 분석해 다음 작품 구상에 활용하려 노력 중일 것으로 믿는다. 필자는 투박하나마 그 동안 주로 경제 현상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 블로그에 게시해 왔으나 이 드라마의 성공을 보고 드는 생각이 있어 가볍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1994년의 서울 모 지역 대학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연히 당시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은 마치 명절 이튿날 시골집에서 옛날 앨범을 펼쳐보듯 과거의 자신들이나 동시대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는 기분으로 이 드라마를 볼 것이다. 그런데 왜 1994년인가? 그리고 이 드라마의 인기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대한민국은 1980년대 초반 대혼란에 빠졌다. 겉으로야 전두환ㆍ노태우 등 군 장성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였고 경제도 세계적인 호황에 힘입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더구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무사히 치러냄으로써 국민적 자신감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대학가에서는 군 출신 집권자의 퇴진과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저항이 1980년대 내내 계속됐다.

그러던 가운데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군부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외형적 민주화는 달성됐다. 대학가 시위는 잦아졌고 경제는 호황을 지속했다. 더구나 대학 진학률이 빠르게 높아졌는데도 졸업하면 웬만한 기업에 취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 안정의 시대가 시작되던 때가 바로 1994년이었다. 그런데 왜 20년이 지난 지금 그 때를 돌아보는 걸까?

당시 대학생들은 오늘날 40대 초ㆍ중반에 들어섰다. 자녀는 대학진학 준비에 바쁠테고 본인들은 한 두번 쯤 실패나 좌절을 맛보고 난 뒤 이제 겨우 여가 시간을 맛볼 수 있는 처지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오랜 만에 20년 전 앨범을 펼쳐보는 재미가 특별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사회생활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냉혹해졌고 국민들의 자신감은 날로 하락해 가고 있다.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불만이 더 많아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럴 수 있다. 과거의 이례적으로 편안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차 한 잔 마시는 것은 좋다. 그러나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막장" 드라마나 허무맹랑한 드라마가 판을 치고 있어 달리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다면 "응답하라"의 인기가 시사하는 바는 가볍지 않다. 우리의 대중매체는 국민들이 현실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소하는 데 머리를 맞대고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크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은 1994년의 두 배에 달하지만 졸업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방송국에 입사하려면 그야 말로 1초도 아껴 공부하고 시험에 대비해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결국 "진짜" 사회생활을 단 1초도 하지 말고 그 시간을 공부에 투입해야 가까스로 합격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에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갈 수록 사회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 이를 작품에 반영할 역량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과거에는 어린이 시청 시간대에는 공상과학 드라마나 고전을 극화한 방송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간을 초월한 캐릭터 인형이 등장하거나 현대의 실생활을 바탕으로 한 극이 많이 방송되고 있다. 제작자들도 우리 어린이들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그림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차피 시청하는 어린이들이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일까?

어른들을 위한 시간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직후 등을 무대로 한 드라마는 편안한 마음으로 옛날얘기 하듯 잘 만들어 방송하면서도 현재의 실상에 대한 토론회 등은 고작 개그 프로그램만도 못한 결과를 맺기 일쑤고 그나마 앞날에 대한 고민을 이끌어내고 다양한 견해를 결집할 공간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킥킥대며 한 장 한 장 들여다 보는 지금 이 앨범을 닫고 오늘의 40대는 어떤 책을 펼쳐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미래, 이 나라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도록 이들을 이끌만 한 그런 계기가 더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1990년대 중ㆍ후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원하면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은 세계가 놀랄 만했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 및 국내총생산 총액 세계 순위(실선, 우축)은 2000년대 들어 소폭 하락하거나 상승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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