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 기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뒤를 이어 누가 총재에 지명될 것인지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4년이고 총재의 연임을 상정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임기 중 신임 한국은행 총재를 최소한 한 번 임명하게 된다. 총재가 임명될 때마다 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이 말이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말은 얼핏 듣기에는 정부로부터의 독립, 구체적으로는 청와대나 기획재정부의 압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런 대로 멋져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력한 대통령제 정부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대통령이 총재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제도 아래에서 총재가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오는 3월 말 퇴임하는 김중수 총재의 경우 임명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제수석보좌관을 역임했고 지명된 이후 수차례 정부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은행 독립성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 나는 동참하고 싶지 않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이란 "한국은행 집행부 및 금융통화위원회가 자체 판단에 반하는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일 뿐 어떤 기계적인 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예측가능한" 한국은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 책상 서랍에서 1994년 외신기자가 된 뒤 몇달 만에 쓴 기사가 게재된 신문 스크랩을 발견했다. 제목은 "한국은행 자치권 요구 목소리 커져"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재정부가 사실상 지배하던 금융통화위원회를 한국은행에 돌려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이를 다룬 기사였다. 이 요구가 실현되기까지 그로부터 3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당시 전문가나 한국은행 측의 요구대로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정부 관료의 자리는 사라졌고 상당부분 제도적인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은행의 독립성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한국은행의 독립이 아니라 합리적인 한국은행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합리적인 중앙은행은 법을 개정한다든지 어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든지 어떤 독특한 인물을 총재에 임명한다고 일거에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민과 언론이 중앙은행에 대해 창의적인 관심을 갖고 냉철한 비판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언론은 특정 이권을 가진 인사들이 제공하는 가십성 제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싶은 유혹에 굴하지 말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유도할 수 있는 보도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관련한 과거 글은 작년 7월에 쓴 "한국은행 독립성의 우상을 넘어"를 참조하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