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경제연구원의 『글로벌 리플레이션 현상 진단』 보고서 내용 중 주요 부분 공유)
■ 리플레이션의 원인과 전망
물가상승 주 원인은 과잉공급 조정
최근 선진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대안정기와 유사한 2~3% 수준까지 올랐다. 하지만 수요회복 때문에 물가가 높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계수요가 호전되고 있지만 속도가 완만해 아직 수요 측면에서의 인플레이션 압력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주요국에서 주가지수, 제조업 구매자지수, 소비자 심리지수 등이 상승하고 있지만 생산이나 소비 등과 같은 실질지표들의 증가속도는 기대만큼 빠르지는 않다. 예를 들어 애틀란타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의 1분기 성장률이 0.6%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물가상승으로 디플레 리스크가 줄어들고 미국 재정확장 정책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경제주체들의 심리는 호전되었지만 가계의 실질적인 소득증가가 아직 미진하고 정치사회적 불확실성도 높아 실물경기의 회복세는 강하지 않다.
물가상승을 가져온 중요한 원인은 수요회복이라기보다는 과잉공급의 조정이다. 지난해 1월 배럴당 26.9달러까지 낮아졌던 국제유가(두바이 기준)는 이후 오름세를 지속하며 올 1월 53.7달러로 2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는 수요가 늘어서가 아니라 OPEC 산유국의 감산합의 때문이다. 저유가가 지속될 경우 국가재정 악화로 정치불안이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로 산유국들이 감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그동안 과잉설비가 우려되던 산업분야에서도 공급조정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가격 하락 추세가 완화되었다. 특히 중국은 기업부채 증가가 국가리스크 확산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과잉설비 산업에서 생산능력을 과감하게 줄이고 있다. 대표적인 공급과잉 산업이었던 철강의 경우 중국정부는 과잉공급 조정을 위해 2016~2020년 1억~1억5000만 톤의 감축목표를 세운 바 있으며 이를 초과달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철광석 가격은 연초대비 두 배 가량 상승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전자부품 부문에서도 글로벌 기업들의 M&A나 생산라인 조정 등 구조조정으로 판매단가가 상승세로 전환했다. 유가상승과 대규모 선복량 감축 등 해운기업 구조조정에 힘입어 해상운임도 지난해 상승흐름을 보인 바 있으며 선박수출 가격도 하락세가 완화되는 상황이다.
최근 대부분 주요국에서 리플레이션 현상이 관측되는 점도 국제원자재 가격이 물가상승의 주요 요인임을 설명해준다. 오랜 기간 동안 주요 국가들의 물가상승률은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그 원인으로 국제원자재 가격 변화, 공통된 경기사이클, 유사한 통화정책 방향 등이 지목된 바 있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대부분 국가의 실물경기가 부진해 임금상승이나 대내 수요요인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이 거의 없었으며 통화정책 역시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제한되었다. 결국 국제 원자재가격 변동이 각국의 물가상승률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각국 인플레이션 변동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요인을 추출해보면 실제 원자재가격과 매우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난다(차트 8 ). 세계물가는 2000년 이후 미국과 유로존 물가상승률 변동분의 65%, 86%를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2000년대 호황기에 세계물가 설명력이 53%, 47%였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설명력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확인된다(차트 9 ).
원자재 공급조정에 따른 인플레 효과는 조만간 사라질 것
향후 원자재 가격 상승세는 멈출 것으로 예상된다. OPEC 산유국들이 감산목표를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원유재고가 줄어들고 있지만 국제유가 상승으로 미국 셰일오일 시추활동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EIA는 셰일오일 생산 증가세가 점차 가속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셰일오일의 한계생산비가 50달러대인 것을 감안할 때 국제유가는 상승세가 지속되기보다는 50달러대 수준에서 안정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초 유가가 20달러대까지 떨어진 바 있어 올 1분기 전년 대비 유가상승률이 60%를 넘어섰지만 향후 50달러대 유가가 유지된다면 조만간 물가상승 효과는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원자재 가격도 지속적인 상승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철강의 경우 수요증가가 본격화되지 않은 가운데 중국이 생산능력을 줄였지만 가격이 오르면서 중국의 철강기업들이 생산물량을 쏟아내는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3월중 미국과 유럽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월 대비 하락세를 기록했다. 원자재 가격 급등효과가 사라지면서 주요국에 나타났던 빠른 물가상승세는 점차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기 본격 상승국면 진입은 어려울 전망
세계경제가 하향흐름을 멈추고 반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상승흐름이 상당기간 지속되면서 본격적인 경기상승 국면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아직 불확실하다. 수요확대와 생산증가가 소득증가로 이어져 다시 수요가 확대되는 선순환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높다.
현재 세계경기 회복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지만 미국은 완전고용 수준에 이른 실업률로 추가적인 고용확대가 점차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며 임금상승 우려로 통화긴축 기조도 본격화될 예정이다. 미연준은 올해 금리를 2차례 가량 추가적으로 더 인상할 계획이며 2019년까지 3% 수준까지 정책금리를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수요확대의 힘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금리상승은 소비와 투자를 둔화시키면서 경기회복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특히 주택경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건설경기와 관련 내구재 수요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우려된다.
또한 주요 선진국의 정치사회적 불확실성이 호전되던 기대심리를 다시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최근 트럼프 케어 실패에서 보듯이 야당이나 공화당 내 반발로 인해 인프라 확대 등 트럼프 재정확장 정책이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트럼프 정부는 정책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통상압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회복되던 세계교역의 흐름을 약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연달아 예정되어 있는 유로존 국가들의 선거일정이나 브렉시트 시행 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이 유로존 국민들의 수요심리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
2000년대 중반의 대안정기에는 세계교역 확대를 통해 개도국의 노동력이 선진국의 기술과 결합하면서 생산성의 빠른 상승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이러한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 반대로 세계교역을 축소시키는 보호무역주의의 흐름이 강화되면서 분업을 통한 생산성 증대효과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경제는 2000년대 중반의 4%대 성장을 회복하기보다는 3% 내외의 낮아진 성장률을 기준으로 등락할 가능성이 높다
초저물가보다는 2~3% 수준 예상
세계경제가 다시 0%대 초저물가 상황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유가가 다시 급락하기보다는 50달러 내외 수준을 당분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부진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주요국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상승 압력은 점차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올 3월 실업률은 4.5%를 기록해 10년만의 최저수준으로 낮아졌다. 유로존 실업률은 여전히 9.7%로 높은 수준이지만, 독일의 경우 실업률이 올초 5.4%까지 낮아지는 등 통독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일본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보다 훨씬 낮은 3% 초반의 실업률까지 낮아진 상황이다(차트 10 ).
실업률뿐 아니라 구인구직 비율 같은 다른 노동지표들도 노동시장이 타이트해졌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일본의 유효구인배율(구인자수/구직자수)은 지난해말 기준 1.4배로 199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구인난을 겪는 일본기업 중 36.6%가 인건비 상승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등 임금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기업들도 구인난에 시달리는 것으로 조사된다. 독일 기업들의 40%가 숙련노동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는 실업률 하락이 임금 및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낮은 실업률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노동부족 현상이 심해질 경우 앞으로 임금상승에 따른 인플레 압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세계적인 노동생산성 저하 추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고령화로 서비스산업 중심의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반면 생산가능인구 증가세는 계속 낮아지면서 노동시장에서의 인력부족 현상이 심화될 전망이다. 중기적으로도 임금상승 속도가 물가상승 속도보다 빨라지면서 물가상승을 견인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화정책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물가상승은 용인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시작으로 각국 통화정책이 긴축기조로 돌아서겠지만 경기회복 흐름이 빠르지 않은 만큼 급격한 금리인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미연준은 그동안 2%를 밑도는 인플레가 지속되었던 만큼 향후 상당기간 동안 물가목표 수준을 상회하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당분간 단기금리가 물가상승률을 상회하지 않도록 금리 인상의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유로존 역시 당분간 인플레 우려보다는 지속적인 경기회복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물가상승률은 당분간 2~3% 밴드에서 등락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 우리나라 물가상승률 전망
하반기 물가상승세 둔화
유가상승이 멈추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향후 원자재 요인에 따른 물가상승 효과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또한 이상기후에 따른 채소류 작황이나, AI, 구제역 등에 따른 농축수산물 가격의 급등현상도 공급이 정상화됨에 따라 점차 진정될 전망이다.
수요 측면에서의 물가상승 압력도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연초 수출이 두 자리수의 높은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지만 단가상승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물량 증대는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반도체 등 고용유발효과가 크지 않은 제품이 수출증대를 이끌고 있어 내수경기로의 파급효과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반도체가 이끄는 수출확대기에는 수출과 내수경기의 괴리가 심했던 경험이 있다. 부동산 경기 둔화로 고용유발효과가 큰 건설투자의 활력이 낮아지고 사드 사태나 북한리스크에 따른 불안요인 등으로 소비심리도 크게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은 지난해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상승 압력도 크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제조업 업황 회복, 매출 증가는 일부 업종에 국한되어 있어 전반적인 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과 해운업 등의 구조조정이 지속되면서 관련 부문의 실업 확대도 예상된다. 올해부터 우리나라의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할 것이지만 전반적인 성장 저하 추세와 높은 청년실업률을 감안할 때 인력부족 현상이 당장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의류 등 소비재 시장의 개방도가 점차 높아지고, 불합리한 유통시장의 제도 개선도 이어지면서 제조업 제품가격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예상된다.
중기적으로 저물가 기조 이어질 전망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국내물가 상승률은 하반기로 갈수록 다시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상반기 중 공급충격 등 단기적 요인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대를 기록하겠지만 하반기 이후 이러한 효과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1%대로 물가상승세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성장둔화 추세를 감안할 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당분간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다소 낮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세계교역의 둔화 추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등 개도국의 빠른 추격, 대규모 경상흑자에 따른 원화 절상 압력 등으로 우리 수출부진이 지속되면서 성장활력이 계속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생산가능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임금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향후 수년간은 성장세 저하에 따른 물가하향 압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중기적으로는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1995년 이후 생산가능인구가 계속 줄어들었지만 극심한 수요부진으로 실업이 더 늘어나면서 1997년 이후 장기간 디플레이션이 지속된 바 있다. 특히 세계교역 위축과 보호주의 압력으로 생산기반이 해외로 계속 나갈 경우 국내 생산기반이 약해지면서 디플레 압력이 확대될 수도 있다.
최근의 인플레 기조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통화긴축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금리격차 축소에 따른 자본유출 가능성을 미리 우려하기보다는 국내경기의 회복국면 진입여부를 좀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중기적으로 낮은 성장세와 인플레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통화정책의 신축성을 높여 중기적으로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범위를 유지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해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내수시장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성장활력을 높임으로써 디플레 리스크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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