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서 성숙으로 - 왜 한국은 빈번한 위기를 겪을까?》
한국경제에 대한 비관론 혹은 위기론은 매년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히트곡 같다. 벚꽃 철이면 항상 들려오는 모 가수의 노래처럼, 지겹지만 또 안 들으면 섭섭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비관론의 이유도 다양하다. 어떤 이는 가계부채로 인한 부동산시장의 붕괴 가능성을, 다른 이는 중국과의 경쟁 패퇴로 인한 몰락, 혹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급격한 이탈에 따른 금융시장의 혼란을 이유로 들곤 한다.
사실 이런 비관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한국은 197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에 한번씩 주기적인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70~1971년 위기로, 수출증가세의 둔화와 대외채무의 증가 속에 한국 정부는 국내 민간 채권자에 대한 지불을 전면 동결하는 한편,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원화가치를 18% 평가절하한 바 있다.
왜 이렇게 한국은 빈번한 위기를 겪을까?
이유는 크게 보아 세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고속성장이다. 신관호 교수 등이 집필한 흥미로운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에 따르면, 한국이 겪은 네 차례의 위기 모두 높은 레버리지와 막대한 외채 의존 상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980년대 초반의 위기였다(책 283 페이지).
"1980년에 발생한 두 번째 위기는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따른 것이었다. 중공업은 규모도 크고 자본 집약적인 산업인 만큼, 정책 추진에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을 떠맡은 재벌들은 현 소유주 겸 경영진의 지배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보다 부채를 선호했다. 그 결과 한국 제조업의 부채/자본 비율은 1974년의 300%에서 1980년에는 500%에 육박했으며, 1982년에는 500%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부채 가운데에서도 특히 외국은행에 대한 부채가 두드러졌는데, 이는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자본설비가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1979년경, 한국의 대외부채/GDP 비율은 33%로 상승했다. 한국의 재정상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차입기간이 단축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GDP 대비 단기부채 비중이 1978년의 6%에서 1979년에는 8%로, 그리고 1980년에는 15%로 급증했다."1997년 외환위기와 판박이처럼 비슷한 일이 1980년에 출현했던 셈이다. 대체 한국의 대기업과 정부는 왜 이렇게 위태로운 전략을 펼쳤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하지만, 연 9% 이상의 경제성장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던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기업을 키우고 또 매출을 확대하면, 재벌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조급함’은 미덕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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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가 주기적인 위기에 빠지는 두 번째 원인은 바로 ‘채찍효과’ 때문이다. 채찍효과란 채찍의 손잡이 부위를 몇 센티만 움직여도 채찍의 끝 부분이 몇 미터 이상 움직이듯, 공급사슬의 가장 끝에 위치한 기업들이 공급사슬의 중간에 위치한 기업보다 월등히 큰 수요의 변화를 겪는 현상을 지칭한다("경영학 콘서트" 283 페이지).
"세계적인 생활용품 제조업체인 ‘P&G’의 아기 기저귀 물류 담당 임원은 수요 변동을 분석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기 기저귀라는 상품의 특성상 소비자 수요는 늘 일정한데 소매점 및 도매점 주문 수요는 변동성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문 변동폭은 ‘최종 소비자 - 소매점 - 도매점 - 제조업체 - 원자재 공급업체’로 이어지는 공급사슬망에서 최종 소비자로부터 멀어질 수록 더 증가하였다. 공급사슬망에서 이러한 수요 변동폭이 확대되는 현상을 공급사슬망의 ‘채찍 효과’라 한다. 채찍을 휘두를 때 손잡이 부분을 작게 흔들어도 이 파동이 끝 쪽으로 갈수록 더 커지는 현상과 유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변동은 유통업체나 제조업체 모두 반길 만한 사항이 아니다. 늘 수요가 일정하면 이를 기준으로 생산이나 마케팅의 자원을 적절히 분배하여 계획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만 변동폭이 크면 계획이나 운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렵다."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채찍효과가 발생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수요의 왜곡에 있다. 소비자의 수요가 갑자기 늘면 소매점은 앞으로 수요 증가를 기대하는 심리로 기존 주문량보다 더 많은 양을 도매점에 주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이 특정 피케 셔츠를 지난 해 보다 5% 더 구매한다면, 이 브랜드는 새롭게 높아진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전년보다 8% 혹은 10% 많은 피케 셔츠를 들여와 재고를 늘려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요가 지금 5% 증가함에 따라 재고가 ‘적정’ 수준을 크게 하회했기 때문이다. 소매점 주문 증가를 집계한 도시 총판도 같은 이유로 소매점 주문량보다 더 많은 양을 제조업체에 주문한다. 즉, 수요 예측이 공급사슬의 끝으로 갈 수록 점점 더 심하게 왜곡된다. 공급하는 제조업체의 물량이 한정되어 있으면,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문하는 도매업체에게 우선권을 주는 건 당연하다. 결국 물건을 공급받기 위해서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더 많은 주문을 해 공급을 보장받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수요는 극도로 왜곡된다.
문제는 한국의 수출 산업 대부분이 공급사슬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보다는 제조업 비중이 월등히 높으며, 제조업 제품의 대부분이 경기에 극히 민감하다. 자동차와 핸드폰은 가장 경기에 민감한 소비재이며, 조선이나 해운업은 2014년 이후의 불황을 통해 얼마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산업인지 지긋지긋하게 깨달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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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위기가 세계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한국은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도대체 왜 일까? (중략) 보다 근본적으로 보면, 한국이 금융 압박에 유난히 취약한데 이는 IMF와 미국 재무성의 권고에 따라 외환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국제화했기 때문이다. (중략) 외국인 투자자들은 위기 직전 한국 주식시가 총액의 50%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 국내 채권 및 주식 가운데 외국인 보유자산은 외환보유고의 250%를 상회했으며, 이는 어떤 주요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지분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채권 등) 다른 투자에서 손실을 입으면, 이들은 한국 증권 보유분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한국은 어떤 신흥시장보다도 더 큰 자본 유출과 극심한 주가 폭락을 겪었다. 한국이 위험에 노출된 것은 또한 금융 부문이 상대적으로 잘 발달된 탓이기도 했다. 은행들의 레버리지 비율은 높았고, 도매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중략)
과거의 세 차례 위기들과 다른 마지막 한 가지가 있다. 한국이 2008년 위기 이전에 금융 상태를 강화해 두었던 덕분에, 통화 및 재정정책을 통해 위기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총외채의 규모는 GDP의 40%로 여전히 컸지만, 순외채는 줄어들어 0이 되었다. 또한 단기부채가 GDP의 20%에 육박했지만 외환보유고도 그 절반 수준에 달했다."한국이 1997년 같은 통제불능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건실한 펀더멘털 때문이었지만, 경제위기 그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임에 분명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1970년 이후 평균 10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경제 위기를, 매일 그리고 매달 찾아올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일단 관심을 끄자. 대신, 정부는 경제를 건실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업들은 위기 지표를 잘 관찰하고 또 모험적인 투자에 앞서 세계경제의 여건, 그리고 공급사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계는 한국경제가 해외 경제의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미국 달러 등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를 고려해보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지정학적 위기가 높아질 때면 라면이나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듯, 글로벌 경제가 위축될 때에는 달러와 같은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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