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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직업의 지리학: 일자리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문제다

책 소개 글을 쓴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워낙 천천히 책을 읽는 편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꼼꼼하게 정리하는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서툰 탓도 있다. 물론 어떤 날은 책을 겨우 몇 페이지밖에 읽지 못할 정도로 분주한 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책 소개 글을 오랫동안 쓰지 못한 데에는 "이 책은 혼자 읽기 아깝다"라는 느낌을 준 책이 많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Paperback: 304 pages
Publisher: Mariner Books (2013)
Language: English
ISBN-10: 9780544028050
ISBN-13: 978-0544028050
ASIN: 0544028058
Product Dimensions: 5.5 x 0.8 x 8.2 inches
(국내에 "직업의 지리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도 나와 있다)
지인 가운데 저술가들도 있고 그분들의 책도 꼼꼼히 읽었다. 바쁜 가운데 직접 만나자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책에 서명까지 해 주는 분들께는 따로 책 소개 글을 남기지 않아 죄송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분들의 책이 내게 감명을 주지 않아서 소개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책은 비교적 특정 분야나 주제에 대한 책이어서 불특정 다수가 읽는 이 블로그에 책 소개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굳이 변명하고 싶다.

이 글에서는 『The New Geography of Jobs』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최근 30여년간 미국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경제적 변화로 확연해진 지역 간 부의 격차를 들고, 그 현황과 배경, 그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의미를 짚어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미국 내 지역 간 부의 격차 확대라는 주제는 얼핏 듣기에 미국인들만의 관심사거나 미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끌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것이 책으로 쓰여지고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감명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은 결국 미국에 관한 얘기만은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제목을 다시 보니 결국 이 책은 '일자리'에 관한 책이었다.

경제개발 초기에 있거나 중진국 단계에 막 접어든 나라들에게 일자리는 그리 큰 걱정거리가 못 된다. 경제가 그야말로 매달, 좀 심하게 말하면 매주 성장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빠르게 확대되는 나라에서는 언제나 일자리가 부족하다. 물론 특정 분야나 특정 산업에서 특정 일자리가 남거나 구직자가 일자리 증가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서 구직난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소득국 및 중진국의 경우 일자리 문제는 국가적 의제 가운데 비교적 우선순위가 떨어진다.

문제는 한국같이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하고 경제 체질도 어느 정도 변화했지만 그런 변화에 그 사회나 정부가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경우다. 한국은 1997-98 외환위기를 맞이하면서 경제 체질을 바꿀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빠른 성장률 회복과 구제금융 변제에 집중하면서 체질 변화의 시늉만 하고 문제를 다시 덮는 선택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가 한국 자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제 자본 이동상의 문제 때문에 시작됐기 때문에 한국은 성장률을 빠르게 회복하고 구제금융을 이른 시기에 갚을 수 있었다.

환율이 급등했고 금융산업은 대규모 해고와 사업체 정리를 겪어야 했지만, 세계 수입수요는 강력했고 한국은 높아진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시장 점유율을 급격히 높일 수 있었다. 채권시장 등 자본시장 개방과 어우러져 외국 자본이 급격히 흘러들어와 경제는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성장률이 다시 높아지고 단기외채는 낮아졌으며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증가했다. 경상수지는 만성적인 흑자 구조를 되찾았고 국민들은 다시 미래를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일자리 문제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성장률은 낮아지고 있으며 사회는 활력을 잃고 있다. 이를 그저 압축성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한국은 이런 시대가 올 것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일까? 많은 학자가 답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많은 답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인들은 원인에 대해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대안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지역은 결국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지역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 책은 지역 간 경제적 격차 확대를 탐구하지만, 어디에서도 그것의 '부당성'이나 그것의 '인위적 해소' 따위의 무의미한 논쟁에 빠지지 않는다. 격차가 확대됐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성공하는 요인을 실패하는 지역이 배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면서도 격차를 불평등이라는 감정적 표현으로 바꾸고, 불평등 해소를 최우선 국정 목표로 해야 한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격차가 부당한 것은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니다. 격차는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격차는 많은 경제ㆍ사회적 요인이 작동한 표상일 뿐이다. 그 요인을 규명해 앞선 주체가 앞설 수 있었던 비결을 뒤처진 주체가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오늘, 이번 주, 심지어 이번 달 벌어진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경제의 저변에서 변화는 그보다 훨씬 천천히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기업, 산업, 지역, 국가 간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많은 요인이 다양한 기간에 작용한 결과다. 똑같이 노력했는데 뒤처졌다고 느낀다면 똑같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격차는 한 번 벌어지면 아무리 좁아도 만회하기 어렵다. 앞선 주체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주체에게 뒤처진 주체가 따라오도록 잠시 멈춰달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발상이다.

지역 간 격차를 연구한 결과 저자는 지식경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초창기 격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한 지역(도시, 기업, 사회, 국가)이 확보한 오늘의 작은 우월성이 미래에 엄청난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가 생겨날 수 있는 요인을 확보한 도시는 더욱더 많은, 더욱더 좋은 일자리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는 도시는 남아 있는 인재도 속속 떠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좋은 일자리라고 하면 평생 해고 위험이 없고 근로시간은 짧으며 인간적인 대우를 누리고 복지혜택은 넉넉한 그런 직장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좋은 일자리란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며 기업에는 높은 수익을 거두게 하면서 많은 관련 산업과 기업, 그리고 인재들이 가까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일자리'를 뜻한다.

한때 애플의 아이폰 제조 및 유통 과정을 두고 애플이 미국 내에서 창출하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책이 쓰여질 당시 기준으로 아이폰이 미국 내에 직접 만들어낸 일자리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자리로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이폰의 실제 조립은 중국, 타이완 등에서 이루어지며 수십만, 수백만명의 근로자가 아이폰 생산 공장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아이폰은 미국 내에서 일자리를 만들지 못했고 중국 등 다른 나라에 수십만,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는 뜻인가?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아이폰 생산과 관련된 일자리 수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폰 디자인 담당자와 아이폰 조립 공장 청소원이 같은 1개의 일자리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도 그렇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도 그렇다. 게다가 간접 고용 효과를 보면 더욱 상황이 달라진다. 연간 수백억원을 받는 사람은 일자리는 1개지만 이 사람이 거주하려고 사들이는 집을 짓기 위한 근로자 수, 이들이 식사하고 생활하는 데 지출하는 곳의 근로자 수 등을 모두 합하면 엄청난 규모다. 어느 것이 좋은 일자리인지는 자명하다.

저자가 확인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지식경제가 심화할 수록 지리적 집적도는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이 확산하면 지리적 거리의 중요성은 사라질 것이며 누구나, 어디에 있든 일할 수 있고, 굳이 회사에 나가서 일할 필요도 없다는 설명은 1970년대 과학소설에는 흔하게 등장하지만 실제로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그렇지 않다. 지식경제가 확산했고 인터넷도 거의 완벽하게 보급됐지만 좋은 기업들은 특정 지역으로 모여 들고 고급 인력은 특정 지역에 모여 사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 따라 특정 지역 집값은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지만, 그럴 수록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는 고소득자들은 그런 지역으로 몰려든다.

이런 현상은 지식경제가 심화할 수록 에코시스템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애플과 사업을 하려면 애플 근처에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애플 근처로 유망 업체들이 몰려들고 그에 따라 애플 근처의 집값과 사무실 비용이 크게 올랐다고 해도 애플 근처에 있어야 애플이 보유한 에코시스템에 속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애플에 전화해서 주변 집값이 올라가지 않도록 협조하라고 할 필요가 없다. 애플 주변 커피숍의 커피가 다른 지역보다 터무니없이 비싸다면 그곳 종사자들의 소득은 높을 것이며 집에 돌아가 주변 상가에서 지출하는 돈도 많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경제는 돌아간다.

일자리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라고 한다. 하지만 지역 간, 산업 간, 기업 간, 직종 간 격차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자리 수를 맞추려고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면, 단언컨대 그런 일자리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일자리 수는 중요하지 않다. 좋은 일자리 수가 중요하다. 좋은 일자리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일(거리)이다. 할 일을 만들어내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일거리를 확보하면 좋은 일자리가 생긴다.

할 일은 없는데 일자리 수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일자리는 세금으로 거둬들인 지폐에 불을 붙인 다음 제대로 타는지 지켜보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것과 같다. 더 태울 지폐가 없어지면 그다음에는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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