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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난해 PPP 기준으로 스페인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1.8조달러로 2조달러였던 한국의 87%에 그친다. 포르투갈의 GDP는 그보다 훨씬 작은 0.3조달러로 한국의 16%에 그쳤다. 이 두 나라를 합치면 연간 GDP는 2.1조달러로 한국보다 약간 많았다. 1인당 GDP 기준으로 스페인은 3만8천달러, 포르투갈은 3만1천달러로 4만달러(PPP 기준)였던 한국에 미치지 못했다. GDP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경제 지표에서도 두 나라는 과거 제국의 모습을 명백히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5-16세기만 해도 이 두 나라는 위 지도에서 보듯 아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선포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더구나 포르투갈 왕실은 스페인이 지배했다. 이렇게 작은 두 나라가 전 세계 영토에 영유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왕국이 당시만 해도 감히 도전할 엄두를 못 내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은 모험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후원해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항로 개척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항로가 개척됐다는 것은 바다를 제패한다는 뜻이었고 새로운 무기와 전술에 취약했던 원주민들은 어렵지 않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점령당했다. 잉카제국도 허망하게 이들의 손에 넘어간 것만 봐도 이들의 힘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날 역사를 돌아보며 항로 개척이니 신대륙 발견이니 잉카제국 멸망이니 하는 사건을 언급하면 그저 그런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다.
기자 출신으로 현재는 "문명탐험가"로 소개되는 송동훈 씨는 새로 펴낸 책 《대항해시대의 탄생(부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모험), 시공사, 2019. 4. 25.》에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기까지의 당시 사정과 뒷얘기, 그런 사건들이 성공하고 실패했던 사정,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의미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낯선 이름과 지명, 다양한 연대 등 암기할 내용이 많아 학창시절에는 세계사에 흥미를 갖지 못했지만, 이 책은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과감한 축약도 하고 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출처: 《대항해시대의 탄생》) |
더구나 왕조 중심 역사 기술이나 연대 및 사건의 나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통 역사학자가 아닌 저자는 문명탐험가로서 큰 주제에 따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갑작스럽고 극적인 등장과 역시 갑작스럽고 극적인 이들의 몰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고 있는 부분도 내 생각과 일치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아폰수 1세가 세운 부르고뉴 왕조의 아홉 번째 왕으로 왕조를 몰락의 길로 이끈 페르난두 1세를 묘사하면서 저자는 "처음부터 국내외적으로 무리한 정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왜 무리한 정책을 시작했을까? 주제 파악을 못 했기 때문이다. 페르난두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포르투갈의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자질이 부족했다. 그런데 열정만은 넘쳤다"(p. 50)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사정은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한편 저자는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엔히크의 업적을 설명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무지는 공포를, 공포는 무지를 강화시켰다. 엔히크가 사그레스에서 한 첫 번째 작업은 이 무지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 각지에서 우수한 지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탐험가, 항해가, 항해 기구 제작자 등을 불러 모았다"(pp. 96-97)라고 소개한다. 이 대목도 역시 오늘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때 성공하는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옳은 설명이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진영 사람인지, 과거 성향이 어땠는지 등을 따지는 경우를 흔히 본다.
또, 포르투갈 왕국의 실권이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의 손아귀에 넘어갈 정도로 시급한 상황에서도 어리석은 왕 아폰수 5세는 자신만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어리석은 군주는 언제나 시대에 뒤떨어진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p.144)라고 지적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권력을 의탁한 국민들의 미래를 위해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 직접 도움을 준 사람들,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측근들에 휘둘리는 지도자야말로 올바른 정책 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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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계를 호령하던 포르투갈의 몰락은 서서히 다가온 것이 아니다. 놀랍도록 갑자기, 그리고 극적으로 포르투갈이 몰락의 길을 걸은 데 대해 저자는 그 씨앗이 제국이 절정을 향해 전진하던 전성기에 뿌려졌다면서 "쉽게 누리는 자가 개척한 자의 어려움을 잊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역사의 네메시스, 천벌이다"(p. 216)라고 일침을 놓는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그저 어쩌다가,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기 쉽다. 더구나 이렇게 선조가 이루어놓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그럭저럭 유지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정치 지도자도 있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이다.
위에 소개한 내용 이외에도 책 곳곳에서 저자는 한 왕이나 왕조, 나아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 성공과 실패의 씨앗이 뿌려진 배경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이 될 만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강대국들이 우주 개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한국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만, 우주 개척이라는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국가의 모든 활동으로 의미를 넓혀서 생각해도 충분히 말이 되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 참고: 이 소개 글은 저자로부터 조건 없이 증정받은 책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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