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 가운데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해 소개하고자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뿌리째 드러내 바꿔 보자'는 부제가 붙은 『Radical Markets』라는 책이다. 법학자 Eric A. Posner와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 수석 연구원 E. Glen Weyl이 2018년 저술한 책으로, 이 글은 2019년 발간 본을 기본으로 한다. 국내에 번역본도 있지만, 아래 글은 일부 표현에 있어 번역본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소련) 블록의 붕괴와 중국 공산당의 계획경제 실패 이후 결국 미국을 필두로 한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이 전 세계의 유일한 지배적 경제 사조가 됐다. 정파를 구분할 때 리버럴이라는 단어가 보수파와 경쟁적 관계에 있는 진보파를 지칭하기도 해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때의 자유주의와 혼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발음대로 리버럴 혹은 리버럴리즘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리버럴 경제 체제의 특징은 자유로운 시장, 대중의 투표로 결정되는 주권, 그리고 전 세계의 통합을 들 수 있다.
리버럴리즘 원리에 따르면 시장은 경쟁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하며, 간혹 시장의 기능이 실패할 경우 정책 당국이 비용-효용 분석에 의거해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개입을 단행해 시장이 기능을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원리는 대체로 잘 작동해 온 것으로 분석됐고, 이런 식으로 리버럴 경제 체제는 더욱 발전해갈 것이라는 믿음이 확산했다. 나날이 악화하는 역내 및 국가 간 소득 불평등 문제도 결국은 리버럴 체제 원리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해결되지 않더라도 대다수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는 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이며 정책 당국이 사회안전망을 잘 설계하면 최악의 피해자는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지난 2007-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GFC)가 전 세계를 20세기 세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공황으로 빠지게 했지만, 대공황 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미국과 주요국 중앙은행과 재정 당국은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와 종류의 정책 수단을 동원해 경제 하강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숫자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2016년 시점에서 돌아보면 GFC라는 일시적 충격에 따른 공황이 진짜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의 리버럴 경제 체제 자체의 누적된 문제는 이제 정책 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추거나 몇 차례 더 양적 완화(QE)를 시행하거나 온갖 이상한 약자로 이루어진 정책을 시행한다고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개인 및 국가 간 소득 불평등은 지속 불가능한 정도로 벌어졌고 고소득국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상승을 멈췄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통화량 공급과 정책 완화에도 인플레이션은 살아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가운데 소득 불평등은 확대되는 상황(저자는 이것을 '스태그니퀄리티(stagnequality)'라고 부른다)은 이미 극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기존 리버럴 체제를 유지하면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보완하는 수준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즉, 고쳐서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되므로, 이제 리버럴 체제의 원리 자체를 근본부터 바꿔야 할 때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흔히 radical이라는 단어는 '급진적이다'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어원을 따져 보면 이 단어는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 책 제목에 붙은 radical이라는 단어는 '급진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보는'의 뜻을 지닌다. 현대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고 너무도 친숙하며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이지만, 과연 오늘날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는 원리 자체는 문제가 없을까? 문제가 있다면 원리부터 다시 들여다보고 바꿔볼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저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책 내용을 전부 요약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자들은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유재산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사유재산권이 절대적인 사적 권리로 여겨지는데 과연 그래야 하는가? 물론, 당장 사유재산권을 폐지한다고 해도 이를 대체할 원리 가운데 다른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원리가 입증된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방식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고, 그 폐해도 많이 쌓여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이 되는 투표에서 널리 채택된 1인 1표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투표를 할 때 그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1인 1표를 행사한다. 어떤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직접 피해를 보는 사람이나 사적인 이익을 보는 사람이나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나 모두 1표를 행사한다. 이것은 문제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따라서 잘 모르는 사안이거나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표를 행사하지 않고 아껴 두었다가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가중된 표를 행사하면 어떨까 하는 대안도 저자들은 제시한다. 과연 이 방식은 부작용이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1인 1표제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제도를 근본부터 다시 돌아보자는 저자들의 제안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대안들이 모두 타당하거나 당장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는 내 개인적인 성향과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물론 많은 나라에서 시민들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는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원래 의도하던 모습에서 너무나도 많이 벗어나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자유경쟁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은 정말 이루어지고 있는가? 민주주의를 채택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정말로 작동하고 있는가? 1인 1표제에 따라 선출된 정부는 1인 1표제가 추구하는 원리를 잘 지키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밖의 책 내용은 김종승 SK텔레콤 블록체인 사업개발 유닛 팀장이 CCTV뉴스(http://www.cctvnews.co.kr)에 게재한 칼럼이 잘 요약해 소개하고 있어 링크를 공유한다(⇒ https://www.cctv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915).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를 제약하는 원리들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