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0

한국은행 독립성의 우상을 넘어

(필자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한국은행 독립성"이라는 말은 경제 기사 뿐 아니라 금융시장 참가자에서 한은 직원, 나아가 대학교수나 학생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언급하는 주제다.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한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 때마다 언론이나 금융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여지 없이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말과 함께 정부를,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한은 총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크게 일어난다.

그런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거의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 이 구절이 언급될 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생각하는 것은 정부의 압력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한은 총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럴싸하게 들릴 지는 몰라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뜻이 너무나 모호하거나 자의적이다.

단적인 예로 한은 총재가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정부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나머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은 금리 인하와 동결 두 가지 견해로 대략 절반씩 나위어 있다고 치자. 이런 상황에서 한은 총재가 기준금리 인하를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다면 한은의 독립성은 훼손된 것일까?  

이보다 더 복잡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은 총재가 금리를 인하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시장의 지표(채권 금리 등)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등은 금리 인하를 반영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때 정부에서 금리를 동결할 명백한 논리를 제시하며 사실상 동결을 요구한다면 한은 총재는 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한은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금리를 동결해야 하는 것인가?

필자가 이렇게 가상 상황을 만들어 하고 싶은 얘기는 한은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1997/98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이 되고 금통위 위원 가운데 정부 추천 위원의 수가 줄어들기 이전에 금통위는 제도적으로 명확히 정부의 관할 아래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한은법 개정은 오랜 기간 동안 정치권과 학계 그리고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많은 진통을 겪은 끝에 이루어졌다.

당시에도 물론 법 개정으로 한은의 독립성이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독립성 차원에서는 대체로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중수 총재가 2010년 대통령의 지명을 받자마자 "정부와 협력"을 강조하면서 한은의 독립성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물론 김 총재가 한은 내부 출신 인사가 아니며 심지어 대통령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이라는 점도 일조했다.

이후 총재로 취임한 뒤 김 총재의 한은은 자주 시장 및 전문가들의 전망과 다른 금리 결정을 내렸고 그 때마다 언론과 시장에서는 정부의 의견에 따라 김 총재가 움직임으로써 한은의 독립성을 저버렸다는 식으로 이를 해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4월 김 총재가 취임 후 처음으로 정부의 공개적인 금리 인하 요구를 거부하고 금리 동결을 이끌어냈을 때 시장과 언론은 한은의 독립성이 존중됐다고 말하는 대신 김 총재가 "아집"을 부렸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한은의 독립성"이라는 구절은 제도적 독립이 이루어진 오늘날 너무나 모호한, 어쩌면 더 이상 유효성을 잃은 개념이 됐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총재가 내부 출신이냐 외부 출신이냐의 여부, 혹은 총재의 대정부 협력에 대한 시각 등을 가지고 한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든지 훼손한다든지 평하는 것은 너무나 기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국은행(BOE) 처럼 아예 외국인을 총재로 임명하면 논란이 없어질 것인가?

필자는 이제는 한은의 독립성이라는 일종의 우상을 넘어 한은의 합리성을 우선 가치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장의 주장이나 전망과는 다르고 정부의 견해에 일치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필자는 완벽한 논리를 제시하고 그러한 논리에 기초한 미래 정책도 예측가능하게 제시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한은 총재라고 인정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합리적 한은을 추구하려면 한은 내부부터 한은의 목표를 모두가 공유할 필요가 있다.

한은 내부 출신이면서 한은의 "관례"를 존중하는 총재가 한은을 가장 합리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너무나 약하다. 만일 그런 논리를 따른다면 대통령은 기존 집권당이나 정부 내에서 가장 통치의 관행을 잘 아는 사람이 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우리 나라를 미래에 닥쳐올 도전을 가장 합리적으로 극복하고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변화시킬 지도자라고 믿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지도자의 파격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살 날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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