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0

"한국은 안전자산"이란 말을 이해하는 한 방법

(※ 필자의 사견입니다.)

올 여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국채매입프로그램 축소, 즉 테이퍼링 임박 우려로 많은 신흥국 금융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해당국 환율은 급등(절하)하며 위기감까지 감돌았다. 그렇지만 한국 주식과 채권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매수세는 오히려 늘었고 원화는 급격하지는 않지만 견조한 절상세를 보였다. 그 와중에 한국 원화가 "안전자산"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이 말에 크게 부산을 떨거나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기억,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시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거 이탈로 위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던 경험, 그리고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시 잠시나마 불안감 속에 지내던 기억 등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한국인들 사이에는 비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당국자들 사이에는 은근히 이같은 외부의 호평에 뿌듯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더구나 작년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 상향조정에 이어 이렇게 외국에서 한국의 경제적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데 대해 국민들로서는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는 정도의 분위기는 느껴졌다. 국내 금융시장에서는 웬만한 해외 시장 동요에도 투매 행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외환시장은 극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획득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그동안 미뤄져 온 각종 불합리와 비효율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국회는 미래보다는 과거, 타협보다는 대립, 국익보다는 사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벌들은 내부적 비효율을 타개하고 대외 개방형으로 구조개혁을 이루려는 노력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정부 각부처에서는 소신보다는 보신을 더 중요시하는 듯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필자는 이런 분위기가 불안하기만 하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발발 몇 해 전인 1994년 외신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경험을 바탕으로 할 때 더욱 불편한 심기를 떨치기 힘들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8년 올림픽 개최와 빠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적 자신감이 높아가고 있었고 첫 민간인 대통령이 자리를 잡으면서 정치 발전에 대한 기대감도 팽배해져 있었다. 더구나 선진국 클럽인 OECD 가입을 앞두고 있어 해외에서도 많은 인정을 받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신문기사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S&P)社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한등급 상향조정했다...재정경제원은 미국의 양대 신용평가기관 중의 하나인 S&P가 우리정부와 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등급을 이달부터 상향조정한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혔다."
이것은 1995년 5월 초 기사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사들은 당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꽤 높게 매기고 있었다. S&P 기준으로 AA- 등급은 최고 등급인 AAA보다 3단계 아래인 높은 수준이다. 심지어 18년이나 지난 오늘 현재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A+로 당시보다 한 단계 낮다.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국제경제적 위상은 당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2년 뒤 대한민국은 6ㆍ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까지 한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사태 직전까지 내몰리게 됐다. 그 사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그 사이 대한민국은 무슨 일을 게을리한 것일까? 당시의 상황을 장황하게 소개할 생각은 없다. 대신 간단히 정리하자면 국회는 이익집단과 각 정당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지도자들은 없었다. 재벌기업들은 외형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필자가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왠지 오늘의 사회상을 묘사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오늘날 상황도 크게 보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경제는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고 재벌 위주의 산업구조는 비효율이 지적되고 있으며 국민들을 이끌고 계도할 사회지도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정부정책은 국민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정치권에서 윤색되기 일쑤고 국회 내에서 타협이란 단어는 "치욕"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필자가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부정하거나 대한민국의 앞날에 저주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용등급이든 그 무엇이든 영원하거나 대가가 없는 것은 없으며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오히려 몸을 사리고 더욱 체질을 강화하지 않으면 그 역풍은 거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에 대해 "일종의 안전자산"으로 부상했다고 말하면서 그 말미에 "However, the robustness of this new safe haven status has not been tested."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한국이 안전자산 지위를 계속 유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니, 한국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전자산 지위를 유지한다고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필자는 이 문장을 이해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는 블로그의 다른 글과 아래 그래프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프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1991-1995 기간중 평균 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정부부채, 경상수지 추이와 최근 5년간의 비교)

(최근 3년간 원, 엔, 유로, 위안 가치 변화 추이. 기준월을 100으로 치환)

(최근 1년간 원, 엔, 유로, 위안 가치 변화 추이. 기준월을 100으로 치환)

(중ㆍ장년층의 고용상황은 개선되고 있지만 청년층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다만 위 표에서는 인구구조의 변화도 감안해야 한다.)

(유가증권시장에서의 외국인 주식보유 비중 10년간 추이)

(1995년 5월 신문기사)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 변화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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