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의 책 『행동하는 용기(The Courage to Act)』를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버냉키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이 80여 년만에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선두에 선 연준의 수장으로서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왜병을 격퇴하고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끌어 사후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던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1592년 정월 초하루부터 노량해전(露梁海戦)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음력 9월 17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일기다.
두 사람 모두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침착하게 과거의 사례나 상식적인 사고를 참고하되 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blue-sky thinking)하되 그 결과 내려진 결론을 수많은 의혹의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용기(courage to act)를 보여주었다.
우선 버냉키의 책은 영어 원서로 읽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만한 분량이고 문장도 평이하게 쓰여 있다. 연준 의장이라는 고위 관료이기 전에 교육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 소통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던 만큼 버냉키가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읽는 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많은 배려를 하면서 글을 썼다는 느낌이 충분히 배어난다. 이 소개 글은 원서를 기준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 책 내용에 해당하는 기간 중 한국은행 통화정책과 한국의 거시경제 및 경제정책과 금융시장에 대한 보도를 책임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미국 경제 상황과 연준의 정책 등이 그 자체로는 새로울 것은 없다. 정책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의 대대적 인하, 그리고 TARP(Troubled Asset Relief Program), TALF (Term Asset -Backed Securities Loan Facility), Term Auction Facility (TAF) 등의 수많은 긴급 조치 프로그램들도 낯익다.
그런 만큼 책을 읽으면서 나는 버냉키와 연준 그리고 미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런 조치를 구상하게 된 당시 상황과 그런 구상을 정책으로 밀어부친 버냉키의 용기에 더 눈길이 갔다. 사실 그런 용기 덕분에 미국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부도 직전에 빠질 때의 상황부터 줄곧 외신에서 한국 경제를 담당해 온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버냉키의 용기 자체보다 더 감명깊게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법적ㆍ제도적 측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정책 최고 책임자는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완벽하게 알고 있으며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한 상태에서는 제도나 관행, 그리고 남들의 시선 등에 휘둘리지 않고 직접 뛰어다닌다.
민주당 소속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금융위기가 시작됐을 때의 연준 의장이며 다른 정파인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임명한 버냉키를 연임시켰으며 역시 공화당 정부 때 뉴욕연방은행 총재로 버냉키와 긴밀히 일했던 티모시 가이트너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중요한 결정을 들고 대통령을 찾을 때마다 부시와 오바마 대통령은 "연준 의장으로서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그대로 하시오"라고 흔쾌히 승인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다"고 힘을 실어주곤 했다.
연준 의장으로서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투표권을 가진 위원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위원이 있으면 이메일, 전화, 점심식사 등을 통해, 아니면 형식을 갖추지 않고 직접 만나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내용도 등장한다. 법적으로 정부의 개입이나 협조 혹은 이해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재무장관에게 이메일을 쓰거나 직접 만나 협의하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이런 것에 대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나 정부의 영향력 등의 구실로 비난하는 목소리를 걱정하거나 그런 비난을 하는 언론도 별로 없다.
의회 지도자들 및 소관위원회 위원들을 비공식적으로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면 이를 해소하려 노력하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물론 의회가 때에 따라서는 국가보다는 정파의 이익에 함몰돼 있으며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한탄을 하는 부분도 있지만 최소한 당시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런 과정에서 의전이나 기타 형식을 의식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미국 정치권 및 정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도 비난에 무게를 두지 않고 해결을 촉구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책 578페이지에서 버냉키는 "우리 정치인들과 일부 전문 관료들은 내가 보기에는 이데올로기적 반대파를 이기고,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합의점을 도출하고 불완전할 지라도 모두에게 유리한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모두가 승자가 되는 방법을 찾는 데 너무 소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미국 정부가 성공적인 경제를 성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려면 우리는 상호 존중, 타협, 그리고 증거에 대한 개방성 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현재 미국 정부는 이런 덕목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미국에 대한 부러움만 느낀 것은 아니다.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고 또 연준과 미국 정부의 노력 덕붙에 세계 경제가 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맞지만 사실 미국은 철저히 자국 이익을 위해 행동할 뿐 다른 나라와의 협조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고민과 결정은 단 하나 "미국의 번영"을 위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그런 점을 떳떳하게 내세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좋게 보자면 솔직한 것이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점은 굳이 감추거나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 달러가 압도적인 세계 최고 기축통화고 미국의 정책이 세계 모든 나라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점을 감안하면 미국 당국자들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과감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당연히 버냉키나 미국의 어느 당국자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인해 전세계 금융시장 및 경제가 수렁에 빠진 일에 대해 미안해 하거나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직 작은 나라면서 금융산업의 세계 영향력도 미미한 한국으로서는 경제정책을 수립할 때 항상 큰 제약에 처하고 많은 고려사항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한국 당국자들이 미국처럼 과감하고 통쾌하게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중앙은행 총재가 재무부 장관이나 의회 지도자들과 수시로 이메일을 주고 받고 필요하면 격의 없이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런 저런 구설에 오르지 않을 수 있는 풍토는 분명 부러운 일이다.
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기계적이고 표피적으로 강조하는 데 열중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준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가이트너가 재무부 장관에 발탁되는 일이나 재무부에서 오래 요직을 차지했던 사람이 연준의 요직에 임명되는 일 등은 외면상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관련해 시비를 걸 만한 일일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임명된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말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권한과 책임 그리고 양심에 따른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2014년에 쓴 관련 글 참조: (斷想) 새로운 한국은행 총재를 기다리며)
한국은행 총재가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버냉키 처럼 구체적인 사항을 조목 조목 공개하는 이런 회고록을 쓸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 있는지도 나로서는 의문스럽다. 회고록은 커녕 샌더스를 실명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라든지 공화당 의원들을 실명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내용을 자신있게 포함시키는 것도 우리 풍토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것이 미국의 힘일 것이다.
버냉키 책에서 눈길을 끈 몇 가지 문구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 As it turned out, even the risk of a once-in-a-century economic and financial catastrophe wasn't enough for many members of Congress to rise above ideology and short-run political concerns....It seems clear that Congress would never have acted absent the failure of some large firm and the associated damage to the system. In that sense, a lehman-type episode was probably inevitable. (290-291p)
- Time, in particular, complained about the "Old Testament" attitude of politicians who seemed more interested in inflicting punishment than in avoiding impending disaster. (319p)
- Abraham Lincoln...was quoted as saying: "I do the very best I know how - the very best I can; and I mean to keep doing so until the end. If the end brings me out all right, what is said against me won't amount to anything. If the end brings me out wrong, ten angels swearing I was right would make no difference." (425p)
- They (lawmakers) saw inflation where it did not exist and, when the official data did not bear out their predictions, invoked conspiracy theories. (433p)
- Senator Bernie Sanders...seemed to see the world as a vast conspiracy of big corporations and the wealthy. (433p)
- Woodrow Wilson.....said: "We shall deal with our economic system as it is and as it may be modified, not as it might be if we had a clean sheet of paper to write upon; and step by step we shall make it what it should be." (466p)
▶ 금융위기 전ㆍ후의 상황 및 연준의 정책을 버냉키가 직접 소개하는 영상과 자료는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행의 위기 극복 정책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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