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헬조선'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즉 조선이 '헬'이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낸 책이다. 가볍게 훑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읽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차사료(조선왕조실록)를 충실히 인용하고 조선 사회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잘 정리한, 거의 교과서와 같은 느낌의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수백 년 동안 고쳐지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해서였기도 했다.
책 제목에 등장한, '두 얼굴'을 가진 주체는 조선 사회 자체라기보다는 그 지배계급인 양반이다. '두 얼굴'이라는 표현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양반의 밝은 면은 '지식 권력자'라는 것이다. 유교 경전이라도 줄줄 꿰고 있어야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 조선 사회였다. 많은 양반들은 학문과 예술에 능한 '르네상스적 인간'이기도 했다. 서양 중세의 '무식한' 지배계급 (왕족, 귀족)과 비교해 보면 그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양반의 긍정적인 측면이 극단적으로 표상화된 것이 바로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도 외국의 지배계급과 다를 바 없는 어두운 측면을 가진 계층이었다. 저자는 그동안의 연구로 밝혀진 여러 가지 '팩트'로 '신화'를 배격하고 있다.
우선, 조선 개국의 주역이라는 '신흥 사대부'와 16세기 조선 정치를 개혁했다는 '사림파'가 과거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고려 시대의 귀족 지배층들이 조선 시대 양반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나는 현재 한국 사회의 지배층들도 상당 부분 과거의 양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가설'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방 관리들이 재정 수입의 일부를 유력한 지인에게 떼어준 '선물'은 조선 양반이 국가의 공적 재원을 자신의 사적 네트워크 관리에 전용한 것으로 이 책을 보고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헬조선'의 특징 중 하나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는 비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조선의 반상제는 법제화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특이한 신분제라고 할 수 있다. 중인과 상민에게 과거를 통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남겨두어 차별에 대한 갈등과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양반의 세습을 법제화하기 않았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조성시켜 지배층의 반체제화를 막는 '치밀하고 세련되며 효율적인 지배체제 유지 전략'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조선 양반의 가장 어두운 측면이라면 물론 노비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 집안에 노비가 700명이었다는 것이 하이라이트. 17세기 무렵엔 노비가 전체 인구의 3-40%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는 '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는 일부 학자들 주장의 근거가 된다. 물론, 결혼한 외거 노비가 많은 등 조선의 노비가 서구의 노예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속 정도가 약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무리가 있다. 유교 윤리가 이러한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선 노비 제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비 증가가 국가 재정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양반이 많을 때는 전체 인구의 10%(사실 이것도 많다), 노비가 40%면 세금을 내는 양인은 인구의 50%에 불과하다. 조선의 조세가 대부분 인두세(군역)나 가구당 세금(공납)이었기 때문에 이는 조세 기반의 축소로 이어지며, 양인의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결국 조선 시대 노비의 증가는 자신의 재산(=노비)을 늘리려는 양반층의 욕구가 재정을 튼튼히 하려는 왕의 욕구를 제압한, 즉 신권이 왕권을 이긴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뜬금없게도, 나는 이 대목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근로소득자 중 소득세를 내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들은 적어도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현대판 '노비'일지도 모른다. 소득세를 내는 '양인'들은 세금을 안 내는(것으로 추정되는) '양반'들을 쳐다보면서 강력한 조세 저항 심리를 가지게 된다. 또다른 '헬조선'의 논리다.
조선 양반층의 최고 관심사는 토지의 증식과 관리였다. (지금도 비슷하다!) 이황의 아들 집안의 경우 3천 두락(30만 평)의 땅을 가진 엄청난 대지주였다. 남녀 구별을 하지 않는 균분상속제가 이어진 17세기 전반 무렵까지는 자녀의 혼처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그 집안의 땅을 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고 한다. 관청의 토지인 관둔전을 전용하는 경우도 많았고, 관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토지를 개간하기도 했다.
양반은 세금을 거의 내지 않았다. 사실 제도적으로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양반이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토지세(전세)의 비중은 갈수록 작아졌으며, 양안(토지대장) 작성 과정에서 양반의 땅은 면세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다.(현재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작은 것이 생각난다.) 인두세인 군역의 경우 양반은 '유학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면제를 받았으며, 결국 군역 면제 자체가 지배층 신분의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지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가구당 부과하는 공납의 경우 대가족인 양반 가구가 상대적으로 이득이 되며, 이를 전세로 바꾸는 대동법 시행에 100년이나 걸린 사실이 양반층의 강력한 반대를 입증한다. 결국 정부는 줄어든 조세 수입을 환곡에서 받는 높은 이자로 보충하게 되었다. 환국 이자 수입이 전세 수입의 3~4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벼슬자리를 차지해야 진정한 양반이다. 관직은 부와 명예를 창출하는 최대의(그리고 유일한) 수단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관직 수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 조선의 관직 수는 5천~6천, 그 중 중인이 아닌 양반이 진출하는 자리는 2,200여 직에 핵심 요직은 300여 직,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은 100직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15세기에 벌써 당상관 자격을 가진 고위 관료가 수백 명을 넘었다니, 요즘 정부의 상황과 정말 똑같다. 이러한 관직 경쟁이 당쟁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조선 사회 최고의 긍지와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제도를 언급할 차례이다. 일단 음서가 있긴 했지만 '출세'를 위해서는 역시 '과거 급제'를 해야 했다. 양반들의 요구로 인해 조선 500년 동안 3년마다 있는 식년시가 163회 치러진 데 반해 비정기 과거는 무려 581회 실시되었다. 양반 사회는 항상 과거 열풍에 휩싸여 있었고, 최다 응시자 기록으로 남아 있는 1800년 3월의 과거에는 무려 10만 3천 5백명이 참가하였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양인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문제는, 과거 제도가 실제로는 그다지 공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녹명'이라는 일종의 신원 조사를 거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조상 중 관료가 없을 경우 관료 3명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 했다. 과거 시험 자체는 실력대로 평가했다 하더라도 경제력과 교육 환경(문화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은 양인이 과거에 급제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지금도 대입 시험이나 고시에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양반층 내에서도 소수 가문에서 많은 급제자가 나왔다. 조선의 전체 문과 합격자 중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남양 홍씨, 안동 김씨의 다섯 씨족이 15%, 상위 38개 씨족이 50% 정도를 차지하였다. 특히,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보면 심환지의 아들이 초시에 합격하지 못하여 최종 시험에서 특혜를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2차 면접에서 당락이 뒤집어지는 것이랄까.
조선의 법제도는 무엇보다 신분에 따른 차이가 심하게 나타난다. 노비가 주인을 해칠 경우 사형은 물론 그 고을의 지방관에게까지 책임을 묻지만, 주인이 노비를 해칠 경우에는 실제로 처벌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급 관리의 상관 고발을 처벌했다는 규정(관원고발금지)을 보니 내부고발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관행이 '유구한 전통'이며 '법제화'까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찾아보니 실제로 시행된 기간은 짧았다고 하지만...) 양반은 범죄의 조사(직접 심문 대신 서면으로 조사)와 처벌(중대 범죄 이외에는 신체형을 부과하지 않고 벌금으로 대체)에 있어서도 특혜를 받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정말 유구한 전통이었다.) 성군이라는 세종 치세에 능지처참으로 죽은 사람이 60명이라는 것, 그리고 조선은 피고인 뿐 아니라 증인도 고문하더라는 구한말 서양인의 증언도 '흑역사'이기에 충분하다.
조선의 사대 외교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이 (민족정기가 아닌) '중화질서 수호'를 위해 거병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창덕궁에 대보단을 만들어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낸 것이 조선 사회의 기본이 되었던 유교적 충효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인상깊었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이어졌던 숭명배청의 분위기 때문에 청나라 전성기의 발전된 문물을 도입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저자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성균관 학생을 국가의 '원기'라고 표현했으며,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데모)와 공관(동맹휴학)을 90여 차례나 하는 등 국가에 대한 압력단체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학생들의 쓰잘데없는 자부심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은 정부의 세금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현재의 사립 중고등학교를 연상시켰다.
짧게 등장한 서당에 대한 얘기는 김홍도의 풍속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서당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서당이 많았던 것은 사실로 여겨지지만, 이 서당들이 과연 조선(남성)의 문맹률을 낮추었는지, 무엇보다 거기서 가르친 한문이 과연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의문이 든다. 쓸데없는 유교경전이나 가르친 것은 아닌지. 한편, 정부에서 서당 교육을 관학에 편입시키기 위해 각 면당 훈장 한 사람을 지정해서 그 면의 교육을 관리시켰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실상의 하급관리, 그러니까 '면서기'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좀 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17세기 정도에 이르러 종법에 집착하는 적장자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정착시켰다는 사실(즉 그 이전에는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고 남녀가 평등하게 유산을 상속받는 사회였다는 사실)은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 이미 익숙해졌다. 다만, 16세기 선조 때만 해도 유생들이 귀고리를 하고 다녔다는 것은 나름 충격적이었다. 성폭행 피해 여성도 처벌했다는 사실은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역시 '헬조선'의 전통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열녀가 나온 가문을 면천시키거나 부역, 조세를 면제(=양반으로 격상)시켜 주었다는 대목은 여성의 목숨(정절을 지키기 위한 자살)이 신분 상승의 통로가 되었다는 또다른 '흑역사'를 드러낸다.
저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지배계층의 지식 권력을 독점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아마 이런 선행 연구가 있는 것 같다.) 한글 창제는 문자생활을 요구하는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시험을 한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한글과 금속 활자를 기반으로 하여 출판업을 발전시킨다거나, 유교 경전을 한국어로 번역한다던가 하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조선에 실현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인 양반층의 전횡에 대한 분노가 이 글의 핵심이다. 왜 우리의 지배계급은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는가?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교과서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나?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나라든 중세-전근대 시기의 지배 계층은 다 이런 부조리한 행동을 했다. 서양 중세의 귀족 영주들도 토지를 전유하며 세금을 내지 않고 농노를 부렸다. 사실 '지식 권력자'로 학문과 문화를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서양의 귀족보다 나은 측면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자체적인 혁명이나 개혁이 아닌 일본의 식민 지배를 계기로 나타났다는 것이리라. 혁명으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들은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지배계급을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식민지 근대화'가 진행된 우리나라 같은 경우 조선의 지배계급, 양반층에 대한 비판은 자칫 식민 지배의 합리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조선 지배계층의 문화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부터 보호한 우리의 전통'으로 찬사를 받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조선시대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저자도 서문에서 '나는 뉴라이트 역사학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도 이 책에 자주 인용된 사학자 계승범 교수가 최근 자유경제원 초청 강연에 연사로 등장한 것을 보면 조선 비판이 '뉴라이트'와 연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하다.
결론은? 나야 옛날부터 '식민지 근대화론'을 현실로서 인정하기 때문에 조선 지배층에 대한 통렬한 비판 역시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지배층의 문제점들이 현대 한국 사회로까지 이어진 측면을 하나하나 따져 나가다 보면 일본이 주도한 '식민지 근대화'의 불완전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뒤늦은 근대화의 완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헬조선'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한국 사회에 아직 (이성에 따른)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것일 테니까.
한편, 이 책에 실린 조선 사회 비판의 주요 논거 중 하나가 바로 구한말 서양인들의 조선 기행문들이다. 카를로 로세티, 이사벨라 버드 비숍, 호머 헐버트, 아널드 새비지랜도어, 어니스트 해치, 조지 클레이턴 포크, 윌리엄 길모어, 샤를르 달레, 윌리엄 그리피스, 제이컵 로버트 무스, 대니얼 기포드, 제임스 스카이 게일... 이들은 하나같이 조선 사회의 '전근대성'을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당시 (1870-1910년) 유럽과 미국은 얼마나 '근대적'인 사회였는가? 그 때 서구는 조선을 그렇게 마음놓고 비난할 만큼 충분히 발전되어 있었는가? 백인우월주의적 측면이 포함된 것은 아닐까?
특히 19세기 말의 시점에서 이들이 조선의 교육을 '암기 위주'이며 '독창적 사고력의 발전에 도움을 줄 것 같지 않다'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그러면 19세기 말 영국, 미국의 교육은 과연 얼마나 사고력 발전에 도움을 주었던가요?'라고 되묻고 싶어졌다. '왜 한국/아시아의 교육은 백년이 넘게 똑같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PISA 점수는 항상 아시아가 높은데...'라고 분통을 터트리고 싶기도 하고.
[출처] 두 얼굴의 조선사 (조윤민)|작성자 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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