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0

(책소개/스크랩) 전쟁과 역사2 - 한국 사람이 쓴 역사서 중에서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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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어려서부터 너무 역사관련 책을 많이 읽은 탓이었을까요... 저는 한국사에서 제일 싫어한 부분이 '전쟁' 부분이었습니다. 차라리 경제사나 정치사가 재미있지, 전쟁 부분은 너무나 한계가 분명했거든요. 특히 그넘의 유학, 성리학 등등이 우세해진 다음부터는 전쟁에서 붙어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편견을 가지게 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윤관의 9성'이었습니다. 

윤관의 9성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지금껏 역사공부하면서 읽었던 전쟁사 중에서 가장 짜증 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윤관이나 척준경 같은 훌륭한 장수가 함경도는 물론 만주 땅 일부까지 점령(동북 9성)해놓은 것을.. 이자겸을 비롯한 고려의 권신 세가들이 철수를 주장해서 결국 힘들게 확보한 영토를 포기했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읽은 책 "전쟁과 역사2 - 거란·여진과의 전쟁"은 이런 저의 생각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음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일단 여진 전쟁의 전사(前史)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면, 이 전쟁은 고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진족들이 완안부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또 흥기하던 시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죠. 특히 금의 건국을 주도하던 완안부가 지금의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며, 천리장성의 일부가 무너지고 정평 등의 고려 땅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는 참극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무려 17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편성해서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함경평야 일원의 땅을 정복해 여진족이 다시는 고려 땅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물론 무작정 처들어간 게 아닙니다. 여진족에게 천리장성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은 후, 수 년에 걸쳐 신기군과 항마군 등을 편성하고 훈련했음은 물론 윤관과 척준경 왕자지 등 당시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명장을 동원해 단숨에 쳐들어 갔습니다. 불과 1년이 되기 전에 지금의 함경남도 땅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이상은 '다수설'입니다).

그러나, 당시 고려군은 두 가지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는 '병목'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습니다. 병목이란 말 그대로 해안가를 따라서 두만강으로 진군해 나가는 한편, 만주에서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평야로 내려오는 길의 한 지점(=병목)을 차단하기만 하면 함경도 지방을 쉽게 차지하고 또 영구적인 고려의 영토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완전히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잘못된 지리 여건으로 인해, 힘들게 만들었던 윤관의 9성은 순식간에 차단당하고 말았던 것이죠. 즉 개마고원에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 길은 샐수 없이 많았으며, 이 샛길을 이용해서 게릴자전을 펼치는 야전의 명수 여진족과 수년에 걸친 진흙탕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당시 여진족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윤관의 9성을 건설한지 불과 18년 뒤에 송(宋)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지배하는 거대 제국을 건설할 정도로.. 몽고족 이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의 '지도'는 금의 최대 영역을 보여주는데, 만주에서 회하에 이르는 거대한 강역을 차지한 것을 알 수 있죠.




암튼 이렇게 어마어마한 제국을 건설한 금나라, 그리고 금나라의 건국을 주도한 완안부와 피터지는 싸움을 3년간 진행하면서 고려는 현실을 알게되었죠. 예전처럼 분열되어 있던 부족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닌, 치밀한 전략을 가진 지도부에 의해 훈련되고 단합된 거대 제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고려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9성을 포기하고, 이주시켰던 백성들을 다시 원래의 지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전투를 벌였는지는 아래 대목을 보면 실감할 수 있을 듯 합니다(310~311 페이지). 

(구원군을 이끌고) 윤관이 좁은 길을 서둘러 지나갈 때, 매복했던 여진군이 튀어나와 고려군의 본대를 덮쳤다. 이 기습공격은 대단히 치밀했던 모양으로 여진군은 먼저 고려군의 중간으로 끼어들어 윤관의 앞뒤를 차단하고, 허리가 잘린 고려군을 뒤로 밀어내고 강력한 방어진형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윤관과 오연총(부사령관)은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후미의 군대는 잘리고 흩어졌다. 여진군의 차단선을 뚫고 들어가 윤관을 구하려면 이들을 정돈하고 수합해야 하는데, 길은 좁고 고려군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략)

당장 무슨 행동이든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 척준경이 용사 10여명을 뽑아 결사대를 조직했다. 형을 따라 참전했던 동생 척준신이 이 무모한 공격을 말렸다. "적진이 견고하여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공격은 자살행위니 무슨 이득을 보겠습니까?" 

척준경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의라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척준경은 이 말을 남기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척준경은 10여 명을 쳐죽이고 적진을 돌파했고, 이들의 분전으로 윤관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척준경과 결사대원들이 가세하여 윤관을 엄호하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산골짜기에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 왔다. 여진족은 도주했고, 고려군은 이들을 추적해 36명의 수급을 취했다. (중략)

윤관은 위기를 모면한 후, 고려군은 전진을 보류하고 영주성(명천)으로 돌아왔다. 이날 윤관을 공격한 여진족은 완안부의 주력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본격적인 전투는 열흘 후인 1월 26일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이 병목 전투는 고려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고려가 여진 정벌을 시작하면서 9성을 점령 목표로 삼은 결정적 이유가 병목 골짜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개마고원에서 함흥평야 지역으로 내려오는 유일한 출구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윤관이 이 곳을 막으러 가다 어이 없이 매복에 걸렸던 것이다

즉, 윤관을 비롯한 고려군은 병목 골짜기 이외의 다른 지름길을 통해 여진군이 진격해 온 것을 까맣게 몰랐던 셈이다. 

17만 대군을 지휘하던 총사령관이 매복에 걸려 죽을 뻔했던 긴박한 순간도 순간이지만, 고려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어떤 무위를 뽐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결국 해안가를 따라 건설했던 9성이 전략적인 우위를 상실했던 게 아마 윤관에게는 더욱 뼈아팠을 것 같습니다. 

제일 앞의 지도에서 보듯, 윤관이 건설했던 9성은 모두 바닷가의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건설되었기에, 개마고원에서 내려오는 게릴라 부대가 해안가에 건설된 도로를 차단하는 순간 모두 고립되어 구원군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고려군은 강했습니다. 정확하게는 3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단련된 고려군은 무적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단련된 17만 고려군은 차츰차츰 쇠약해졌습니다. 일단 겨울철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곳에서 벌어진 야전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동상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 나아가 협소한 해안도로를 따라 식량을 날라야 했기에, 이 과정에서 항상 굶주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 전쟁이 만 3년을 지나.. 4년 차에 도달했을 때, 고려는 전쟁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완안부 주도하의 여진족이 얼마나 강한지 깨달았던 데다, 전체 인구 800만 내외로 추정되는 고려의 경제력으로는 17만의 야전군과 그 이상의 보급부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반대로 여진족은 달랐습니다(338 페이지). 

패배에서 교훈을 얻은 (완안부의 장군) 알노는 고려가 축성한 9성에 대항하여 자신들도 9성을 쌓고, 이곳을 거점으로 출몰하면서 고려군을 괴롭혔다. 고려의 성을 쉽게 함락할 수 없으니, 자신들의 주둔지를 강화하여 강습작전에 대비하면서 지구전으로 가자는 의도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진군은 본대를 보호하는 동시에 후방의 여진부락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보급과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장기전에는 확실히 여진족이 장점이 있었다. 그들은 군민일체의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군대의 동원이 쉬웠고 사회적 비용도 적게 들었다.

주요 부족도 30개나 되었다. 실제 30개 부족을 다 동원하지 않았겠지만, 그들을 로테이션 시키며 길주공격에 투입하면 한 달에 1개 부족만 투입해도 3년 동안 쉴 새 없이 9성을 두드리는 공격이 가능했다. 

농경민족이 기마민족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죠. 즉 인구빨입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이미 650만 가까운 세력으로 불어나 있었기에, 고려가 인구빨로도 여진족을 압도할 방법이 없었죠. 결국 농경민족이 잘하는 '수성전(혹은 공성전)'으로 가야 하는데, 고려는 당시 '공격'의 입장이었으니 이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암튼 어떻게 고민해도 안되는 전쟁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고려의 여진족 침략이 완전히 헛수고는 아니었습니다(351~352 페이지). 

장기적으로 보면 고려의 여진정벌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진은 요동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고려를 자극하거나 병탄하려는 시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조선에 대한 후금의 태도와 완전히 다르죠?). 

전력을 다해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려 했던 거란의 뼈아픈 전례를 상기해보면, 아골타의 대 고려 정책이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 거란의 실패를 거울 삼아, 고려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내부방침을 세웠던 게 분명하다. (중략)

평화도 힘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고 강력한 군대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거란과의 30년 전쟁, 그리고 여진족과의 4년 전쟁을 통해 보여준 고려 병사의 투혼과 무훈이 고려의 전성기라는 12세기의 평화와 번영을 일구어 낸 것이다.

또한 이 때의 전역은 300년 후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고 우리의 국경을 압록-두만강 라인으로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직접 윤관의 9성 위치를 비정하고, 동북면 관리들에게 자료수집과 조사를 명할 정도로 이 전역에 대해 다대한 관심을 보였다. (중략)

세종은 이때의 전역을 분석하여 필요한 전술과 교훈을 찾아냈다. (중략) 세종은 고려 관리들의 분석을 경청하고,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실패의 원인과 문제를 정확히 짚어 냈다. 세종은 윤관의 전투 경험을 살려 함경도 전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 완전한 방어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세종대왕이 참 대단한 먼치킨이라는 느낌입니다 ㅎ

아무리 여진족이 분열되어 있다 해도, 고려가 실패했던 여진족 정벌을 성공해서 지금까지 한민족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해도.. 고려의 위업을 낮추 볼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강한 여진족과 붙어서 수많은 주요 전투는 모두 승리했음에도, 전쟁에서는 패한.. 그 처절한 과정을 폄하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암튼..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강력! 또 강력 추천하는 바입니다. 임용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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