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데 이어 한국과 타이완 등도 강력한 정부 통제 아래 짧은 시간 안에 수출주도형 산업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중국도 1970년대 말부터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이들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동남아시아 각국도 경제 개발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동남아시아의 시도는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다. 필리핀은 한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으나 지금은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라는 자부심과는 달리 경제 발전 측면에서는 저조한 실적을 내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일본과 한국을 따라잡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동남아시아 인접국들보다는 빠른 성장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일본과 한국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이라고 하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쉬운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위에 설명했듯이 비슷한 정책 방향을 채택했으면서도 동아시아에서 아직까지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과 타이완이 유일하다. 게다가 한국에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건설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탄생한 반면 타이완은 그렇지 못했으며 국민소득 측면에서도 타이완은 서서히 한국에 뒤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막대한 국가 주도 투자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분야를 제외할 경우 세계적인 기업이 나타나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How Asia Works』에서 저자는 그 이유를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 단계는 농지개혁을 통한 농업생산의 급증이다. 한국과 타이완의 경우 비록 미국과의 관계나 국민당 정권의 정치적 필요 등 이유는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비교적 철저한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즉 이들 두 나라에서는 실제 농민들에게 농지 소유권이 최대한 많이 돌아가도록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를 통해 농업생산과 농가소득은 짧은 기간 안에 크게 늘었다. 이렇게 농가소득이 늘어나면서 각종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됐다. 여기서 두 번째 단계인 산업화 정책이 빛을 발하게 된다. 정부는 증가하는 공산품 수요를 국산품 생산을 통해 충족한다는 목표 아래 각종 혜택을 제공하면서 대기업을 육성하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국내수요 충족이라는 목표에 덧붙여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수출 확대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할 것을 기업들에게 주문한다.
이 단계에서 한국은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여러 가지 혜택을 몰아주는 대가로 기업들로 하여금 과감한 수출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압박을 느끼도록 다양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경쟁관계가 항상 성립하도록 여러 기업을 지원했다. 따라서 기업들은 국내적으로도 경쟁에서 살아남는 동시에 국제적인 경쟁에서도 도태되지 말아야 하는 압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리고 포스코와 현대건설 등은 해외 시장에서도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타이완도 한국에 뒤지고 있다. 이제 세 번째 단계인 금융 통제를 살펴보자. 한국과 타이완은 강력한 정부 주도 아래 금융의 최우선 목표를 산업화를 달성하는 데 두었다. 기술개발과 국제경쟁력 확보를 성공적으로 이룩하는 기업들에게는 실질 기준으로 거의 금리가 제로 혹은 심지어 마이너스 수준으로 금융 지원이 이루어졌다.
반면 경쟁에서 뒤쳐지거나 수익을 내지 못하고 국가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기업들은 과감하게 시장에서 축출하는 식으로 금융 정책을 운영했고 여기에 정부가 완벽한 통제를 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IBRD), 그리고 미국 정부 등이 꾸준히 금융 및 자본 자유화를 권고하고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이 겉으로는 이를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사실은 교묘하게 이를 거부했다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는 앞에 설명한 세 가지 단계에 있어서 모두 한국처럼 철저한 정책을 펴는 데 실패했고 결국 한국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농지개혁은 구호에 그쳐 농업생산은 정체됐다. 산업화 정책도 수출 확대 및 세계적 경쟁력 확보라는 목표를 엄정하게 강제하는 데 정부가 실패했으며 여기에 지도자들의 정치력도 한국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세번째 단계인 금융 정책에 있어서도 동남아시아 각국은 한국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일찌감치 IMF, 세계은행, 미국 등의 요구에 굴복해 금융산업 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채택했다. 그 결과 금융기관들은 국가 산업 발전보다는 당장의 이익과 특수관계인에 대한 특혜에 치중했고 단기 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부동산 시장 등 비생산적인 분야에 큰 거품을 만들었다. 그 결과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맞게 됐고 그 후 회복도 더딜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IMF와 세계은행 등이 주도하는 금융자율화 및 자본시장 개방 등을 뼈대로 하는 이른바 워싱턴 콘센서스를 저개발국에 강요하는 것이 문제가 크다고 강조한다. 더구나 IMF의 경우 저개발국이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데 적절한 정책 제안을 하지 못하거나 반대의 권고를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유보적 내지 비관적인 듯하다. 지금까지 급속한 경제 성장은 다분히 첫번째 단계 즉 농업생산 증대를 통한 공업제품 생산 확대와 더불어 일부 대기업의 성장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저자는 인구나 국토의 규모가 유례없이 큰 데서 오는 효과가 사라지고 난 이후까지 중국 경제가 빠른 성장을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성장을 주도한 대규모 기업들의 수익성 및 경영구조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정책 실패를 묘사할 때도 박정희 정권과 비교를 하곤 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 마음은 가볍지 않다. 한국은 지금까지의 정책 패턴으로 산업화에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산업화 이후 어떤 정책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한국이 이룩한 산업화는 현대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것만은 틀림 없다. 한국의 산업화가 마치 우연히, 그리고 대외 여건의 도움으로 손쉽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최근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비관론이 널리 퍼져 있다. 과거의 영광이 미래의 모든 문제를 저절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처절한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것이며 다른 많은 나라가 실패한 정책을 한국이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아래 그림은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주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1인당 국민소득(PPP기준, 미국 대비 비율) 추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서평을 위해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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