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6

(斷想) Pretence of Knowledge: 지적 가식 경계하라는 하이에크의 말




며칠 전 몇몇 기자들과 함께 국내의 한 저명 경제계 인사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들은 말이 지금껏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날 대화는 통화정책 분야에 모아졌으며 케인스, 하이에크, 그린스펀, 버냉키, 옐런, 양적완화, 아베노믹스 등등 그야말로 쟁쟁한 단어들이 모두 언급됐다. 대화 도중 그 인사는 "Pretence of Knowledge"라는 문구를 소개하며 경제정책을 펴는 데 있어 "무언가를 안다는 가식"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오스트리아 태생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가 1974년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국내에는 "지식의 오만" 등으로 번역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는 체" 또는 "지적 가식" 쯤으로 해야 할 것이다. 지식의 오만이라고 하면 지식 즉 안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지만, 하이에크가 사용한 문구는 당시 연설문 내용으로 보아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꾸미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하이에크의 사상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말한 이 "지적 가식"이란 말이 인간에게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하이에크는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회과학에도 자연과학적 개념과 자세가 많이 도입됐지만 이를 절대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적이라고 하면 절대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지만 사회 현상 가운데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 특히 경제학 등 사회과학에서는 이론 못지 않게 현실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 현상에 대한 무수히 많은 이론이 주장되고 가르쳐지고 있지만 이들 이론은 사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수십년 혹은 수백년간 정설로 통용되고 학습돼 온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 사회에서 맞아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책을 펴는 데 있어 이론에 따른 도식적인 효과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된다.

실례로 우리나라에서 정부나 중앙은행의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국회 내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전망했던 내용, 예컨대 성장률이 실제와 큰 차이를 보일 경우 심지어 이를 질타하거나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나 국회의원도 있다. 그러나 경제전망에는 수많은 "전제조건"이 등장한다. 이들 전제조건 가운데 연말까지 예상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마 한 가지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년 사이에는 많은 일이 생긴다. 

따라서 그런 전제조건 가운데 어떤 부분이 예상과 달리 진행됐으며 그것이 예상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불가항력적이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성장률 전망치와 실제가 크게 차이가 났다고 다그치는 일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만일 성장률 전망이 중요하다면, 전제조건이 엉망이었는데 우연히 그 해 성장률이 전망한 대로 되면 잘했다고 할텐가? 경제전망은 전망하는 이유를 보려는 것이지 그에 따른 결과를 보려는 것이 아니다.

"지적 가식"을 경계한답시고 사회 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 자세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떤 이론이 유행한다고 해서, 혹은 특정 정파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해서 그 이론을 절대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통계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축구 경기 결과 하나도 제대로 예측해 낼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과학 수준 아니던가!

아래는 당시 하이에크의 연설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최대한 직역. 학문하는 자세로 참고할 만 하니 읽어볼 것을 권함. 원문 전체는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음):

(숫자로 측정되고 나타낼 수 있어야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런 요구 때문에 실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의 가능한 원인으로 제기될 수 있는 사례들이 마음대로 제한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실정이다. 과학적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실로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 및 유사 사회 부문에는 우리가 측정할 수 없으며 기껏 부정확하고 일반화된 수준의 정보만 확보가 가능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들은 그 결과를 정량적 증거에 의해 입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소위 과학적 증거만을 인정하는 전문가들은 이를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측정 가능한 요인들만이 유효 정보의 모든 것이라는 허구를 흔쾌히 밀고 나가는 것이다. 

It can hardly be denied that such a demand quite arbitrarily limits the facts which are to be admitted as possible causes of the events which occur in the real world. This view, which is often quite naively accepted as required by scientific procedure, has some rather paradoxical consequences. We know: of course, with regard to the market and similar social structures, a great many facts which we cannot measure and on which indeed we have only some very imprecise and general information. And because the effects of these facts in any particular instance cannot be confirmed by quantitative evidence, they are simply disregarded by those sworn to admit only what they regard as scientific evidence: they thereupon happily proceed on the fiction that the factors which they can measure are the only ones that are relevant.

사회 질서를 개선하려다가 피해만 남기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복합성이 지배하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사회 분야)에서는 현실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가능하게 해 줄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지식을 취득하든 그것을 활용함에 있어 장인(匠人)이 작품을 빚어내듯 의도한 결과를 도출하려 하기보다는 정원사가 식물을 가꿀 때 하듯 어떤 결과가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적절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자신감은 충만해져 갔지만 여기에는 위험성이 있다. 즉, 공산주의 초기의 대표적 문구를 사용하자면 이러한 자신감은 우리 인간이 "성공의 현기증"에 도취돼 자연 환경 뿐 아니라 인간 환경까지도 인간 의지의 통제 아래 복속시키려는 유혹을 갖게 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지식에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통해 사회과학도에게는 겸양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과학도가 사회를 통제하려는 치명적 욕망에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욕망 때문에 인간은 다른 인간들 위에 폭군으로 군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나아가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수백만명이 각자의 자유 의지로 함께 일구어 낸 결과물인 이 문명사회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If man is not to do more harm than good in his efforts to improve the social order, he will have to learn that in this, as in all other fields where essential complexity of an organized kind prevails, he cannot acquire the full knowledge which would make mastery of the events possible. He will therefore have to use what knowledge he can achieve, not to shape the results as the craftsman shapes his handiwork, but rather to cultivate a growth by providing the appropriate environment, in the manner in which the gardener does this for his plants. There is danger in the exuberant feeling of ever growing power which the advance of the physical sciences has engendered and which tempts man to try, "dizzy with success", to use a characteristic phrase of early communism, to subject not only our natural but also our human environment to the control of a human will. The recognition of the insuperable limits to his knowledge ought indeed to teach the student of society a lesson of humility which should guard him against becoming an accomplice in men's fatal striving to control society - a striving which makes him not only a tyrant over his fellows, but which may well make him the destroyer of a civilization which no brain has designed but which has grown from the free efforts of millions of individuals.




= = = = = = =

이 블로그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