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채와 빚
기본적으로 부채와 빚은 같은 말이다. 하지만 빚이라고 할 때보다 부채라고 할 때 훨씬 더 전문용어라는 느낌을 주긴 한다. 또 빚이라고 할 때는 뭔가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부채라고 하면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부채란 사전적으로는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해서 갖는 청구권 내지 권리를 화폐액으로 표시한 것"이다. 기업회계에 있어서는 자기 자본이 아닌 타인 자본이 부채다.
하지만 부채가 반드시 "부도덕"하거나 "과도한 욕심"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신용카드로 구매하는 경우 구매 시점부터 카드대금 결제 시점까지 모두 부채다. 우리나라의 경우 검소와 절제를 강조하다 보니 "빚을 내"거나 "빚을 지"는 행위를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빚은 자본을 조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현대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다.
2. 국가부채와 나라빚, 그리고 정부부채
한국 언론에는 "국가부채"라는 표현과 "나라빚"이라는 표현, 그리고 "정부부채"라는 표현이 섞여서 사용되고 있다. 위 설명대로 기본적으로 이 셋은 같은 뜻이다. 물론 표현에 대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경우 서로 약간 다른 대상을 지칭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국가나 나라에 대해서는 간혹 "가족"과 같은 위상을 부여하기도 한다. 즉, 국가(나라)가 가족과 같은 운명공동체라며 국가원수를 가장과 같은 존재로 대비시키려는 시도도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족의 부채(빚)는 일차적으로 가장이 책임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상속권 순서로 변제 의무가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듯, 국가부채(나라빚)도 일차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국민들에게 변제 의무가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가(나라)를 가족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는 것은 합당치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다만 국가부채를 "나라빚"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간접적이나마 국민들의 부채인 것처럼 암시하는 것은 글을 감정적으로 만드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정확한 것은 절대 아니다.
국가부채든 나라빚이든 엄밀히는 정부가 갚아야 할 돈이다. 정부가 못 갚으면 국민이 갚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정부가 국가의 해산을 결정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개인이나 기업처럼 생명이 유한한 것이 아니므로 "정부가 못 갚으면"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정부는 영원히 존재하는 법인이라고 보면 된다. 국가부채는 안 갚아도 그만이라는 말도 된다.
그런데도 나라빚이 얼마고 그걸 인구 수로 나누면 1인당 얼마가 된다는 말이 경제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국가부채는 국민이 갚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정부부채라는 말을 왜 굳이 나라빚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걸 왜 인구 수로 나누는가? 정부부채는 정부가 갚기로 약속한 돈이며 갚는 시점도 제각각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자신을 경제전문가라고 하고 이런 표현을 기사 제목으로 달면서 경제신문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3. 한국의 국가부채가 폭발 직전이다?
한국의 정부부채가 급증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폭발한다는 표현도 있다. 정부부채가 급증했다고 할 때 "급증"의 정의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폭발"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정부부채가 급증해서 제2의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정부부채 때문에 외환위기가 오려면 상당히 많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예컨대 정부부채가 너무 많아서 국제 투자자들(신용평가사들)로부터 그 나라 자산이 외면받는 와중에 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서 국제 투자자들이 일시에 그 나라 자산을 매도하고, 그 나라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자본 이탈이 가속화되고 외화부채 상환 비용은 급증하고 외환보유액이 고갈되면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
아니면 정부부채 가운데 외국에서 외화로 빌린 부분이 외환보유액에 비해 너무 많아지면 당연히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 하지만 정부부채가 증가한다고 외환위기가 온다고 하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리스를 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는 방만한 재정 운영 때문에 위기에 빠졌고 유로존 전체가 휘청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경우는 정부부채가 많거나 증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회계부정이 문제가 된 것이다.
(구조적 재정수지의 GDP 대비 비율을 2012~2016년간 평균을 낸 것이다. G20 국가 가운데 구조적 재정수지가 흑자인 나라는 한국과 독일 뿐이다. 국가부채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조적 재정수지다. 매년 재정수지가 적자를 내는 나라는 그만큼 정부부채 감축이나 관리가 어려운 것이다.) |
※ 참고로 페이스북에 소개된 좋은 글을 공유합니다.
1. "빚"에 대한 무조건적인 나쁜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단기적으로 빚을 내어서라도 경기부양을 하는게 좋습니다. 현재 일본이나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경우 국가부채 엄청나게 쌓았습니다. 경기가 좀 풀리면 그때 빚을 적당히 줄이면 됩니다. 한국은 현재 빚이 늘고는 있어도 국가에서 통제 가능한 수준이며, 해외 유수의 신용평가업체들도 한국의 국가신인도를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역대 최고 수준으로 놓고 있습니다.
2. 빚이 많다고 해서 경기가 나쁠 때 무리하게 빚을 줄이면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 더 어려워집니다. 최순실의 돈을 국가가 회수하는 것만으로 빚을 줄인다면 모를까, 많은 경우 빚을 줄이면 보통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 같은 것부터 삭감되기 쉽습니다.
3.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해 비난할 것은 그저 "빚이 많다"는 게 아닙니다. "빚을 냈는데 경제운용을 못했다"는 비난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빚 숫자로 경제 점수를 매기는 것은 무리입니다. 동시에 향후 문재인이 집권해도 당장 빚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문재인도 추미애도 확장정책을 언급한 바 있으며 이러면 단기적으로 빚은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올바른 방향입니다.
4. "가계부채"는 또 국가부채랑은 좀 다르게 접근해야 하긴 합니다. "고령화사회로 인한 부담"은 우선 연금문제랑 연결되고 이것도 국가부채와는 다른 쪽에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자체예산"은 워낙 최근에 망한 지자체가 많아서 적자에 대해 유의해야 하지만, 무조건 흑자를 내는 지자체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지금 유일하게 흑자 내는 지자체가 바로 경남입니다. 무상급식 중단하고 진주의료원 문닫고 하면서 얻은 흑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참고로 현재 버니 샌더스 등 미국의 진보진영은 "정부부채는 아주 많아도 괜찮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 수준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빚에 대한 나쁜 인식"은 유독 한국과 아시아에서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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