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말
블록체인(blockchain)은 인터넷 이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파괴적(disruptive) 기술의 하나’라는 평가와 함께 4차 산업혁명 핵심 기술의 하나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블록체인의 도입과 활용에 대한 다양한 기대가 제시되었고, 이에 따른 많은 논의와 실제 구현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자본시장을 비롯한 금융은 블록체인의 도입이 가장 먼저 시도된 영역의 하나이며, 블록체인이 갖는 강점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 나스닥이 비상장기업 주식거래 플랫폼 Linq의 개발을 발표한 것, 호주증권거래소(ASX)가 자체 청산결제시스템(CHESS)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교체할 계획임을 밝힌 것 등은 자본시장에서 블록체인을 도입·활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대표적 사례이며, 국내에서도 2017년 10월, 금융투자협회 주도로 11개 증권회사가 참여하는 공동인증시스템 ‘Chain-ID’의 개발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자본시장에서의 블록체인 활용은 아직까지 초기 단계이며, 그 중에서도 증권의 발행과 투자를 통하여 투자자의 자금을 기업에 공급한다는 자본시장의 핵심 기능에의 활용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현 시점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평가를 시도하고, 이어서 자본시장에서의 블록체인 도입 가능성을 기업금융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조달 플랫폼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축하는 경우에 핵심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해보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평가
(출처: medium.com/@jeremyvsjeremy) |
다음으로 블록체인의 장점으로 내세워지는 것은 경제성 및 효율성이다. 이는 집중화된 ‘제3자 기관(third party)’이 존재하는 기존 시스템에서는 이 제3자 기관의 설치 및 운영에 따른 제반 비용, 제3자 기관에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 등이 발생하지만,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에서는 이 비용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적이며, 모든 거래가 제3자 기관을 거치지 않고 거래 당사자 간에 P2P(peer-to-peer)로 처리되기 때문에 효율적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3자 기관의 설치 및 운영에 따른 제반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부분은, 정확하게는 이 비용을 전 세계의 (자발적인) 네트워크 참여자들에게 분산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블록체인은 기존 시스템에서 제3자 기관이 집중해서 담당하던 거래처리 및 원장관리를 위한 자원을 전 세계의 네트워크 참여자들로부터 ‘crowdsource’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당한 비효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채굴 경쟁에 소요되는 컴퓨터 연산능력, 전력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크기의 원장 파일을 수많은 노드들이 동시에 저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원장의 승인 및 업데이트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트래픽 등을 고려하면 하나의 블록체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자원의 합은 제3자 기관이 존재하는 기존 시스템에서 소요되는 자원의 합보다 클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블록체인은 제3자 기관이 존재함으로써 얻는 효율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급속한 기술발전에 의하여 컴퓨터 연산·저장 능력, 네트워크 전송 속도·용량 등에서 제약이 거의 사라지고 한계비용이 거의 영(0)에 가까워짐에 따라, 제3자 기관이 없는 P2P 구조가 기술적, 경제적으로 정당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향후 사물인터넷(IoT), 5G 네트워크 등의 기술과 결합하게 되면 이러한 측면에서 블록체인의 효율성은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블록체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는 지배구조(governance)이다. 시스템 혹은 플랫폼의 운영에 관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리더십이 없는, 비트코인과 같은 순수한 개방형(public 혹은 permissionless) 블록체인이 당면하는 어려움은 비트코인과 비트코인캐시가 분할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현재 금융계에서 도입이 시도되고 있는 블록체인은 거의 모두 명확한 운영주체가 존재하고, 네트워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승인이 필요한 폐쇄형 혹은 사적 블록체인이며, 개방형 블록체인에서도 운영주체는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영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블록체인의 초기 선도자들이 생각했던 ‘탈집중화’의 이념으로부터는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제3자 기관이 독점적으로 유지·보유하고 있는 원장은 그 기관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있는 정보이다. 자신이 제3자 기관으로서 서비스하고 있는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원장을 블록체인 참여자들과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환의 유인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구성되는 블록체인은 기존 기관이 완전한 지배권을 갖는 사적 블록체인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 플랫폼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제3자 기관 플랫폼에 대한 경쟁 플랫폼이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성되어 등장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 새로운 기업금융 플랫폼으로서 블록체인의 활용 가능성
자금이 필요한 다수의 기업들과 자금을 운용하고자 하는 다수의 투자자들이 투자은행과 같은 중개기관 없이 P2P로 연결되어 자금조달과 투자가 이루어지는 시장(플랫폼)을 상정해 보자. 자본시장의 경우, 기업은 블록체인 상에서 암호화증권(crypto-securities)을 발행하고, 투자자들은 가상통화를 이용하여 암호화증권을 매수함으로써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시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Yermack(2017)은 기업지배구조 관점에서 블록체인 기반의 주식시장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잠재적 장점으로 주식 소유가 보다 투명해지고, 주식시장의 유동성이 제고되며, 의결권 행사 역시 보다 투명하고 정확해지고, 실시간 회계(real-time accounting)가 가능해짐에 따라 기업경영과 공시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점 등을 들고 있으며, 이러한 장점들이 미래 기업지배구조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반의 자본시장이 실제로 구현되고, 이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현재 ICO 시장의 모습은 이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먼저 기업이 증권을 발행·매각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발행시장의 경우, 순수한 P2P 구조에서는 시장 플랫폼을 개설하고 운영을 책임지는 주체가 없고, 투자은행과 같은 중개기관 역시 없다. 즉, 기업에 대한 모니터링 기능 및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정보비대칭 완화 기능을 제공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 기능은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무임승차의 문제로 인하여 소액의 일반투자자들이 이 기능을 제공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이는 기업이 제공하는 ‘백서(white paper)’ 등에 담긴 정보의 충분성과 정확성을 담보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되고, 레몬시장의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개기관의 역할을 담당하는 어느 정도 집중화된 기구의 존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유통시장의 경우, 현재의 블록체인 기술 수준에서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거래 처리 속도 및 용량, 즉 ‘scalability’이다. 비트코인 이후 새로운 채굴 알고리즘의 개발 등 지속적인 기술 발전으로 블록체인 플랫폼의 거래 처리 속도는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되었으나, 모든 거래가 개별적으로 승인되고 블록에 기록되는 순수한 P2P 블록체인 플랫폼이 거래소에 집중된 기존 시스템의 거래 처리 속도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블록체인 기반의 주식시장 도입 시도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시장(public market)이 아니라 비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사적시장(private market)에서 먼저 시도되고 있는 것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통시장에서의 두 번째 문제는 시장의 가격발견(price discovery)과 관련하여 시장의 가격 정보를 수집하고 게시하는 기능을 누가 수행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현재 가상통화의 유통시장은 중개기관이 존재하고, 투자자는 중개기관을 통하여 가상통화를 거래하는 구조로서 모든 투자자가 P2P로 연결되는 구조는 아니다. 가상통화 중개기관이 시장의 가격 정보를 수집하여 게시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관련 스타트업도 생겨나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의 자본시장에서도 이러한 ‘집중화된’ 기관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되며, 완전한 P2P 구조의 시장은 어려울 뿐 아니라 비효율적일 수 있다.
또한 효율적 시장으로서 일물일가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차익거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반 자본시장에서 주식이나 채권과 같은 자산의 가격이 법화에 의하여 평가·표시되거나, 가상통화에 의하여 표시된다고 하더라도 그 가상통화 자체에 또한 미국 달러와 같은 법화에 의하여 평가되는 가격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외환거래 규제 등으로 인하여 차익거래가 제약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동일한 자산의 가격이 중개기관(혹은 중개플랫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 거래에서 착오나 실수가 발생한 경우 이를 취소하고 정정할 수 있는 기능이 부가되어야 한다. 일단 완결되어 블록체인에 기록된 거래는 취소, 정정, 혹은 변조가 불가능하다는 블록체인의 강점은 현실적인 자본시장 거래에서는 제약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전술한 바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 자본시장이 갖는 잠재적 장점이 도입의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거래전략이나 포지션의 노출을 꺼리는 투자자들은 모든 거래가 실시간으로 노출되는 블록체인 기반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이들을 위한 별도의 거래 플랫폼은 계속 존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 맺음말
블록체인은 자본시장과 금융, 나아가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되는 기술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개선·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비트코인의 등장 이후 초기 선도자들이 꿈꾸었던 완전한 탈집중화의 P2P 블록체인은 실제 도입하여 사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본시장에서 구현될 블록체인 플랫폼은 탈집중화라는 부분은 제외하고, 블록체인의 다른 강점들을 살리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블록체인이 자본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입·활용되기 위해서는 본고에서 언급한 한계를 보완하고 요구사항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시장 참여자의 다양한 성격과 요구사항을 고려할 때, 블록체인 기반의 시스템이 우위를 갖는 영역과 기존의 제3자 기관 시스템이 우위를 갖는 영역이 각각 다를 것이고, 이 영역을 가려내는 것은 시장과 산업계의 몫이 될 것이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사회적으로도 우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블록체인에 대한 초기의 흥분과 과열은 진정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차분하게 현상을 진단하고 향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들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블록체인의 도입과 활용 역시 기민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하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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