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 금융은 단연 달러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의하면 세계 외환보유액 가운데 달러는 61.3%를 차지한다. 2위인 유로의 비중이 20.3%로 나름대로 크지만, 1위의 3분의 1 밖에 안 된다. 그런데, 3, 4, 5위인 엔(5.8%), 파운드(4.5%), 위안(2.1%)의 비중은 보잘것없다. 외환보유액 말고도 국제 지급결제에서 달러의 위치도 압도적이다.
물론 달러 체제가 처음부터 줄곧 세상을 지배한 것은 아니다. 달러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 지배력이 압도적이고 모든 경제 제도와 이론이 달러 체제 아래 쓰인 것인 데다가, 인간의 기억이란 대체로 몇 세대를 뛰어넘기 어려워서 우리는 달러가 지배하는 체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파운드 체제가 붕괴했고, 그 뒤에 달러 체제가 부상했듯이, 달러 체제도 언젠가 붕괴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단한 예언이나 분석이 아니다. 그냥 세상에 무한한 것이 없으니 달러 체제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제임스 리카즈(James Rickards)는 『The Death of Money』에서 달러 체제의 붕괴가 임박했으며 이미 진행 중인 조짐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도 정확히 몇 년쯤 달러 체제가 붕괴하고, 그 다음 어떤 통화 질서가 부상하리라고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달러 체제 붕괴의 구체적인 조짐과 달러를 대체할 통화 질서의 모습, 그리고 이런 격변에 대처하기 위한 투자 행태 등을 제시하고 있기에 "언젠가 달러 시대가 끝난다"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독자들 가운데는 "달러 체제가 어려움은 겪을 수 있지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달러 체제는 더이상 버티기 어려우며 곧 붕괴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잘 모르겠다"라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다"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의 두 가지 견해 안에서도 세부 사항에 관한 생각은 더욱더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국제 경제 및 금융 제도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더구나 격변기에 대처하기 위해 금, 토지, 미술품, 대체펀드, 현금 등을 일정 비율로 보유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저자의 권유를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가 이런 자산을 권유하면서 덧붙인 논리만큼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제1부 화폐와 지정학, 제2부 화폐와 시장, 제3부 화폐와 부 등으로 크게 나뉘고 그 아래 다양한 장으로 다시 나뉜다. 그 가운데 달러 체제 붕괴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한 두 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제3장 시장의 몰락〉에서 저자는 금융시장이 더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금융시장은 매수자, 매도자, 투기적 투자자, 재정거래자 등이 각기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적정가격을 산정하고, 그에 맞춰 거래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날 금융시장은 무소불위의 중앙은행이 군림하고 있으며, 중앙은행 정책에 따라 휘둘린다.
아무리 훌륭한 정보에 기초해 아무리 논리적인 적정가격을 산정했다고 하더라도 중앙은행의 정책 변화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중앙은행의 정책은 돈의 값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시장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에 대해 겸허하고 조심스러우며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중앙은행은 반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금융시장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중앙은행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과감하고 오만한 자세를 취한다. 중앙은행은 어느새 '톱다운' 방식의 사고 체계를 보인다.
20세기 대부분 기간 러시아와 중국이 마르크시즘 이데올로기와 무기의 위력에 의지했다면, 오늘날 중앙은행은 케인즈주의와 박사학위의 위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소위 금융시장은 연방준비제도(연준) 발표문을 누가 먼저 올바로 예측하고, 그에 따라 포지션을 취하느냐의 여부를 겨루는 장이 돼 버렸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금융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곳이 아니라 부를 착취하는 곳이 돼 버렸다.
오늘날 통화 및 재정 정책 당국은 특정 경제 지표를 대상으로 목표를 설정하며, 그 목표 달성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운용한다. 이렇게 상식과 논리 대신 특정 지표의 특정 수준을 바라보며 정책을 펴다 보면 그 지표는 이미 실물경제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인 정책 효과로 인해 잘못된 값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렇게 잘못된 값을 가지고 다음 정책 행보를 결정하게 되고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게 된다.
중앙은행이 휘저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값을 내보이는 금융시장과 통화 및 재정 정책 당국이 과도하게 개입해 잘못된 값을 내보이는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경제를 평가하고 다음 정책을 수립하기에, 정보력이 부족하고 정책의 핵심에 접근력이 없는 일반 시민들의 후생은 개선되지 않고 정책의 혜택은 대부분 거대 금융기관에 돌아가게 된다. 정책 당국은 이런 결과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며 정책이 효과를 달성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미 이들에게 실상은 큰 의미가 없게 됐다.
다음 〈제7장 부채, 적자, 그리고 달러〉에서도 저자는 흥미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한다. 어려운 시기에 정부는 부채를 늘려 위기를 넘겨야 하며, 정부 부채는 그 목적이 선한 이상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주장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이는 부채 정책 주창자들이 문제를 호도하기 위해 부적절한 이분법을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즉, 부채가 긍정적인 부채냐 부정적인 부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늘어난 부채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부채를 갚기 위한 목적이며 명확한 상환 계획이 없는 부채가 문제다. 즉, 부채를 투자해 부채를 상환하고도 남는 부가 창출된다면 문제가 없다. 따라서 GDP 대비 부채 비율이 낮아도 지속적으로 높아질 구조라면 문제인 반면, 부채 비율이 높아도 지속적으로 낮아질 구조라면 괜찮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런 부채 구조의 지속성 이외에도 중요한 원칙이 있다. 즉, 정부 지출을 위한 차입을 정당화하려면 최소한 3가지 원칙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부채를 통한 정부 지출은 비용을 뛰어넘는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둘째, 이런 정부 지출은 민간 부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부문에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그럼에도 전체 부채 수준이 지속 가능한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이 원칙들은 모두 충족돼야 하며, 설령 어쩌다가 결론적으로 이런 지출이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고 해도, 민간 부문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일이라면 정부는 나서지 말아야 한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비단 달러 체제의 조속한 붕괴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대 국제 금융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책이 그리 두껍지 않고 평이한 문장으로 돼 있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Paperback, Published by Portfolio, April 04, 2017, 384 Pages, ISBN 9781591847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