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개발연구원이 발간한 『KDI 북한경제리뷰』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북한 사금융의 발전, 영향 및 전망』이라는 보고서 주요 내용이다. 보고서 전체는 한국개발연구원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다.)
■ 사금융 확산의 의미와 영향
북한 내 사금융의 발전 및 기업화 현상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는 (중략) 북한 이탈주민의 증언 및 북한 내부 소식을 전하는 전문 매체들의 보도 등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사적 자본을 가진 다양한 돈주의 등장과 이들의 공격적인 투자활동은 이제 북한에서도 개인도 사적 소유에 관한 재산권 행사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돈주들은 개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합작투자 등을 통하여 조직화(분업화), 기업화(대형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른바 돈주들을 중심으로 붉은 자본가의 맹아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붉은 자본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자본가와 유사하지만, 다만 공산당의 통치 아래에서 자본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보다 구체적으로 운영방식을 살펴보면, 붉은 자본가는 공산당이 지도하고 규율하는 틀 안에서 운영되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기능을 동시에 활용하고, 국가소유 자산에 대한 이용권을 통해 자본을 운영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개념 틀 안에서 보면 북한에도 이미 붉은 자본가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심화는 북한 당국에게 금융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만들 것이다. 원래 중앙계획경제 아래에서는 금융은 없고, 재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국유은행은 단순한 재정 출납기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융개혁이 진행되면 은행은 점차 기업에게 자금을 융자해 주는 역할뿐 아니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예금과 대출까지 담당하게 된다. 즉, 경제체제 개혁 → 재정과 금융의 분리 → 금융 발전 → 금융개혁이라는 수순을 밝게 되는 것이다.
현재 북한은 부분적 경제체제 개혁 단계에 머물러 있고, 사금융이 비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사적 자본에 의한 기업화 현상이 진전되면서 북한 당국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금융제도를 손질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한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북한 정부는 제한적으로 사금융을 공적금융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 김정은 정권은 외화정기예금, 외화카드, 외화상점의 이용 확대 및 전자상거래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의도는 외화를 흡수함으로써 달러라이제이션 문제를 해소하고 시장에 분산된 사금융을 공식 금융기관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시장경제에 대한 은행통제를 강화하고 국내의 자금 동원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금융의 발달은 북한사회의 구조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출신성분을 바탕으로 한 획득적 지위를 중요시하던 북한사회를 바꿔 놓을 잠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자본력과 시장적응 능력을 바탕으로 한 성취적 지위가 이전보다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른바 돈주의 등장과 성장은 신분과 계층의 분화 현상을 낳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시장적응 능력과 소유한 사회적 자본, 즉 시장활용 능력을 비롯해 정보공유 능력, 당, 보위 간부 등 정치권력과의 네트워크 능력 등에 따라 신분상승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북한 당국은 노동당원이 나라의 중심계층이라고 선전하지만, 주민들 속에선 장마당의 돈주들이 북한을 유지하는 기본계층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장의 발달은 ‘돈주’라 불리는 신흥부유층과 이를 비호하는 부유한 권력층을 형성하였고, 이는 북한의 충성도와 성분에 기반한 계층구조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대외무역과 시장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5~10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資産家)가 24만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됐다(2015년 기준). 최고 자산가 중에는 중앙당 간부나 외교관, 외화벌이 상사원, 시장에서 돈을 번 ‘돈주’ 등이 많다. 오늘날 북한에서 경제력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돈주 등 사금융 주도 세력들의 위상도 비례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사금융 거래는 사유재산권 보호, 경제활동의 자유, 계약의 이행 등을 보호하는 법제도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 당국의 필요에 의해 사금융활동이 허용되고 있지만 공식화, 제도화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금융 활동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돈주’들은 기존의 계층적 기반보다는 경제적 능력을 발휘해 경제적 신분만이 상승한 상태이기 때문에 정치적 상층부에 속하는 계층에 비해 신분 안전 확보라는 측면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다. 더구나 각종 불법활동 또는 비사회주의적 영리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해 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권력층에 의존해야 한다.
‘돈주’는 내부의 연계를 바탕으로 하여 위로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간부계층과의 결탁을 점차 강화해 나가면서 세력을 키우고, 아래로는 노동자계층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자본을 증식시키고 있다. 즉, 경제력을 갖고 있는 ‘돈주’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의 격차는 점차 좁아지고 유착된 관계로 변화하고 있는 반면, 기존의 중간층을 이루었던 노동자계층과 ‘돈주’와의 격차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사금융의 발달은 정보유통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보는 곧 돈이자, 자본이고,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최근에는 휴대폰이 확산되면서 정보유통이 훨씬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이에 따라 빈부격차 못지 않게 경제주체들 간의 정보격차도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적지 않은 탈북자들은 정보와 자본증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공한 돈주들이 변화하는 정치, 경제, 시장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능력은 바로 정보력에서 나오고 있고, 이런 정보력의 차이가 돈주들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하고 있다. 단속 정보에는 지역별 시장정보, 환율 변화동향, 단속 정보, 시장수요의 변화, 인맥 관련 정보 등 매우 다양했다. 휴대전화 덕분에 돈주들은 이동성이 크게 향상되고 가격과 환율을 포함한 시장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인 통신 수단을 갖게 되었다.
한편, 사금융의 발달은 신용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북한에서도 사금융시장이 성장하면서 신용이 갈수록 중요시 되고 있다. 적지 않은 돈주들을 인터뷰한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신용은 돈 거래 상대방과의 관계, 직접 고용 노동자들과의 관계, 권력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핵심 가치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마디로 신용이 없으면 돈주로서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용을 보증할 수 있는 공적기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 신용이 없는 사람은 사업을 확장시켜 돈을 버는 것이 어렵다.
신용을 중시하고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시장경제의 논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는 데도 신용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신용은 자신의 뒤를 봐주는 간부들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같은 동료, 피고용 노동자 등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돈주’들은 대체로 신용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의 능력에 따라 차등적인 보상을 하는 등의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몸에 배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북한에서 현재 ‘돈주’가 된 이들은 대부분 이런 조건들을 일찍부터 습득하고 경제활동을 하는데 적절히 활용한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금융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양질의 비공식 인적 네트워크 확보이다. 적지 않은 돈주들은 사금융 거래에 따른 법적 보호와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정부의 단속과 통제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공식제도의 공백과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사금융 주체를 중심으로 간부 권력층, 일반 노동자, 그리고 같은 동종 업자들 간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장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돈주들은 대개 정치적 신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권력층과의 네트워크 연계를 통해 자신의 신변 보호를 비롯해 사업의 안정성 확보, 나아가 자본증식의 기회 포착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층은 주로 북한에서 사법, 검찰, 보위업무를 담당하는 일꾼들을 지칭한다. 권력층과의 관계 형성과 발전은 주로 뇌물을 수단으로 이뤄지지만, 나중에는 사업 파트너 관계로 발전되기도 한다.
한편, 사금융의 확산은 북한 사회 내 빈부격차를 더욱 벌여놓고 있다. 시장 확대로 나타난 오늘날 북한의 가장 큰 숙제는 빈부차이인지도 모른다. 시장적응 능력과 더불어 사금융 활용 능력의 보유 여부가 잘사는 주민과 그렇지 않는 주민 간 소득 격차를 확대시키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는 것이다. 시장화가 진전됨에 따라 돈주들을 중심으로 부의 집중 및 이에 따른 독과점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고, 이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나타나는 경향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시장의 확대는 자본과 인맥, 시장능력과 같은 사회적 자원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자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자본을 활용한 독과점과 매점매석 등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안기는 폐해도 남기고 있는 것이다.
■ 결론과 전망
돈주나 사금융은 체제전환 초기나 경제개발 초기 과정에 있는 나라들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사금융의 확대 발전은 필연적으로 금융개혁의 압박으로 이어진다. 통상 금융개혁은 대부분 체제 전환국들이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단계로 간주되기 때문에 북한의 사금융 현상은 주요한 관찰과 연구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금융의 다양한 실태는 북한에서 확산되고 있는 시장 메커니즘이 이제 소비 분야에서 시작해 점차 생산, 금융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북한의 돈주나 사금융 확산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금융의 활성화는 북한경제가 이미 상당 부분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전환 초기 과정에서 경험한 궤적들을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금융의 발생 원인이나, 시장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자본이 투자되면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 등은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경험한 공통적 현상이다.
시장이 확산되면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공간과 기술, 기회가 점차 증가함으로 인해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 또한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북한도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입했던 금융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은 시대에 들어 와서 사금융과 돈주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면서 북한 당국은 이제 단순히 시장 통제 수준에서 사금융과 돈주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은 정권이 사적 경제활동을 억제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 충분한 재정능력이 확보되지 않는 한 사금융을 적절하게 용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나아가 사적 금융을 공적 금융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민간 보유의 외화를 합법적, 제도적으로 환수하려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펼칠 것이다.
더구나 핵실험과 미사일 등 군사적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는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사금융시장의 활용 유혹을 더욱 느끼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제사회의 제재가 김정은 정권에게 어떤 경제정책을 선택하게 만들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제재에 따른 외화유입의 축소 등이 오히려 내부 사금융시장에서의 외화조달 기능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3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70년 역사상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 결의로 불리는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북한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들을 상당수 담고 있다. 또한 미국 정부는 3월 19일 연방관보에서 북한 정부와 노동당의 자산을 동결하고 북한과의 특정거래를 차단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새로운 대북제재 행정명령 ‘13722호’를 발동했다.
이같은 다자, 양자간 대북제재가 제대로만 이행된다면 북한의 수출과 김정은 통치자금에 상당한 타격을 줄 듯하다. 북한은 지난 2013년 2월 3차 핵실험 이후에도 국제사회가 부과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제재 아래에서도 북한경제는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물론 4차 핵실험 이후의 대북제재는 범위와 강도에서 이전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제재의 효과는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외화 수입의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국제사회의 제재는 수출, 해외 노동자 송출, 외국 관광객 유치 등에 위축을 초래함으로써 중장기적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재정 축소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정권은 오는 5월에 열리는 7차 노동당 대회에서 핵 무력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의 비전과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뒷받침할 물자와 자금의 공급이 이뤄져야 하는데, 핵실험과 제재로 인해 중국과의 경제관계가 크게 위축되면서 이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당분간 개방의 진전과 외자유치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현 단계에서 경제적 성과는 내자동원에 달려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현 단계 북한경제의 주된 과제는 국내 자금의 최대한 확보와 효율적 배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사금융시장에서 국정 운영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정부뿐 아니라 자율경영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공장ㆍ기업소, 협동농장, 각종 기관들도 사금융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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