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중 갈등, 무역 전쟁, 반도체 전쟁, 공급망 재편 등의 표현은 이제는 막걸리나 탈춤 같은 단어보다 월등히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일상이 됐다. 이에 대해 그 여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인 가운데, 간혹 잘만 하면 한국 경제에 장기적으론 도움이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변함없는 사실은 이 상황은 우리가 선택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하이투자증권에서 『쪼개지는 지구, 쪼개지는 공급망』이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모두 145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매크로 관점에서 보는 미-중 패권 전쟁 - Hegemony 를 위하여', '공급망 재편 속 주목할 만한 국내·해외 산업', '미-중 패권 전쟁, 시장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가?' 등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글로벌 파급효과: 한국을 중심으로',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의 국내 주요 산업',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수혜를 얻는 나라인가?', '관심 가져 볼 만한 국내외 ETF list up' 등 한국에 특화한 내용들도 풍부하다. 여기서는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보고서 링크는 맨 아래 공유한다.
(사진 출처: www.theguardian.com) |
고래 싸움(=미-중 갈등)에 새우(=한국) 등 터진다
(전략) 한국의 입장에서 크게 3가지 고민거리가 있다.
1980년대 미-일 반도체 갈등의 경험
미국은 궁극적으로 반도체 및 첨단기술의 독점적인 우위를 원한다. 한국의 주력 산업이 반도체와 이차전지라는 점은 미국 중심 공급망 구축 초기에 상대적인 수혜를 입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한국의 기술발전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
관련해 과거 일본의 사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의 전후 재건에 힘썼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의 확산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국 재정을 투입해 일본 경제를 재건하기는 부담스러운 선택이었으며, 그보다는 일본의 자체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전략을 취했다. 구체적 전략 중 하나가 반도체 기술 특허 제공이었다. 이후 미국의 반독점 규제가 엄격해지면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은 특허 로열티를 대가로 일본으로 대거 유출되었다. 이렇게 유입된 반도체 기술을 바탕으로 소니, 샤프, NEC 등 첨단 전자제품과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반도체 시장을 대부분 장악하기에 이른다.
1985년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미국 마이크론은 주요 일본 반도체 기업들에 대해 반덤핑 혐의로 제소하는 등 본격적인 미-일 반도체 갈등이 시작된다. 미국 정부는 같은 해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달러 대비 강세를 유도해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켰고, 1986년 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주 내용은 ①일본 업체들의 생산 원가 공개 및 ②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후에도 미국의 여러 보복조치들이 이어졌고 컴퓨터의 대중화와 맞물리며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이전의 위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미-일 반도체 갈등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의 경제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는 있지만 한국 기업들이 미국 경제에 위협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일본, 중국과 마찬가지로 견제가 들어올 수 있다.
미국은 미국 내에 첨단 반도체 공장 및 연구 시설을 짓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지만 대신 보조금을 지원받는 기업의 경우 수익 등에 대해 민감한 정보를 미국 정부에 공유해야 하는 등 다소 까다로운 조건들을 맞춰야 한다. 과거 미국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을 성공적으로 저하시켰던 전략 중 하나가 일본 반도체장비 기업들이 최신 장비를 도입하기 최소 6개월 이전 먼저 미국에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의 경쟁 기업들의 민감한 기술 및 정보를 정부가 우선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업 경영 관련해 잠재적 리스크는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사진: 하이투자증권 보고서) |
높아지는 중국과의 경쟁 강도
한국의 무역패턴은 과거와 같이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고 중국에서 최종재를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구조가 아니다. 즉, 중국과 더 이상 상호 보완 관계가 아닌 경쟁 구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 시장에서는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 덕분에 한국 기업들이 상대적 우위에 있지만 여타 시장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대표적인 예시가 유럽의 이차전지 시장이다.
미국에 중국 이차전지 업체들의 진출이 나타나고는 있으나 여전히 지금까지 공식화된 주요 배터리 셀 업체들의 북미 지역 배터리 셀 생산 캐파 총 증설 규모에서 국내 업체들이 약 74%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북미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약진이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의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강조한 것도 유럽이다. 유럽은 세계 2위 전기차 판매지역이며 2023년 상반기 누적 기준으로 국내 업체들이 유럽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약 58%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은 역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국 기업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북미 시장에서 열세를 보이는 중국은 이러한 유럽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중국 기업들의 배터리 생산량이 중국 내 수요의 두배를 상회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중국 내수 부진에 따라 수요는 부진한 가운데 공급은 과잉 상태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대내적으로 공급량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저가로 해외 수출 시장으로 흘러나올 수 있다. 비록 북미시장에서 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는 하나 중국 제품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여타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인다면 분명 한국 기업들에게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수익성과 점유율을 둔 치킨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치킨 게임에서 중국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이나 금융 지원책 등을 바탕으로 강세를 보일 수 있다. 이미 중국은 디스플레이, 철강 등에서 유사한 성격의 치킨 게임을 시작한 전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약해지는 한국의 성장 동력
현실은 훨씬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미-중 패권 전쟁 이전에는 전세계가 하나의 파이를 나누어 먹는 구조였다면, 패권 전쟁 이후로는 미국 진영과 중국 진영으로 파이를 둘로 나눈 후 나눈 조각을 또 다시 나누어 먹는 구조가 되었다.
그간 한국이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내적 요인도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중국의 가파른 경제 성장에 따른 수혜를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이 아닌 미국 경제에 의존해야 한다. 미국은 이미 상당히 성숙한 경제이며 중국 대비해 성장률 레벨 자체가 낮을 수밖에 없다. 신공급망 재편에 한국이 비교적 수혜를 입을 수 있는 국가임은 맞다.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성립하지 않는다지만 공급망 재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와 대비하면 파이는 작아졌고 세계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효율성도 포기해야 한다.
즉, 미-중 갈등 속 한국의 장기적인 성장 동력이 약해질 수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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