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인들이 경제지표를 언급할 때면 어리둥절해질 때가 많다. 얼핏 들어도 부정확하거나 부적절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정당이 공식적으로 내놓는 견해는 신중한 편이다. 하지만 최근 한 정당이 내놓은 환율정책에 대한 공식 논평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어서 관련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우선 논평 전문을 보자:
“정부가 수출 진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고수해 온 고환율정책은 경제해법이 아닌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해외자본의 국내 유입, 기업 경영수지 호전, 물가안정과 소비증대에 따른 생산·투자·고용증대의 선순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점진적인 환율 인하 유도 정책을 펼쳐야 한다”여기서 고환율정책은 원화 가치를 정상적인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는 정책, 즉 달러/원 환율을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하는 정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차제에 노무현 정부 이후 각 정부 집권 시기별 원화 가치의 변화를 살펴보자.
위 그림은 교역상대국 통화 가치와 물가 수준을 감안한 특정 통화의 상대가치를 표시하는 실질실효환율(REER) 지표로, 여기서는 위안화, 엔화, 원화의 변화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집권 이전에는 1997/98 외환위기로 급락한 이후 원화 가치가 서서히 안정세를 되찾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다루지 않았다.
위 그림에서 보면 원화 가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중반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다가 미국에서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이 진행되기 시작한 2007년 중반 하락반전해 정부 말기에는 제법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한국 국내적으로는 경상수지가 악화되면서 원화에 대한 수요가 줄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는 미국 국내 불안 요인이 일부 알려지면서 달러 선호 심리가 이미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원화 가치가 이미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와중에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당국자들은 경상수지가 악화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원화 가치가 너무 높다고 판단하고 환율을 가급적 높게(원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고환율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때 고환율 정책이 문제가 된 것은 원화 가치가 이미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 그런 정책이 실시됐다는 점이다. 이후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미국 금융위기는 본격화되고 위험자산에 대한 세계적인 매도가 이어졌으며 원화 가치는 급락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정책 수장을 교체했고 새로 들어선 당국자들은 고환율이나 저환율을 선호하기보다는 시장의 흐름을 최대한 존중하는 입장을 보였다. 다만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원화 가치의 상승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속도를 조절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서 불거진 유로존 재정 위기로 원화 등 위험자산에 대한 회피 심리가 다시 높아졌고 한국 당국으로서는 원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과 그로 인한 자본 유출을 우려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원화는 2008년과 비교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어 원화 가치가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최고 수준까지 회복한 시점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수출에 의존한 경제 구조의 개편 필요성을 꾸준히 언급했고 실제 당국자들의 발언과 태도 등을 보면 환율을 시장에 맡기되 단기간 급등 혹은 급락시 속도를 조절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국자들은 특히 지금까지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는 가운데 과도한 외환시장 개입을 경고하는 미국 재무부의 발언에 신경을 쓰고 있다. 실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즉 고환율정책이라고 비난한 앞의 논평은 사실과 반대인 것이다.
그럼 고환율정책이나 저환율정책이 암시하는 것처럼 한국 당국은 원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혹은 낮게 유도하는 정책을 펼 수 있을까? 나는 단기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정책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IMF 등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자본시장을 거의 전적으로 개방하고 환율정책을 관리변동환율제도에서 자유변동환율제도로 변경했다. 즉 원화 환율이 시장 상황과 달러 수급에 크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실제 원화 환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잘 알 수 있다.
위 그림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기간의 달러/원 환율,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 그리고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서 거래되는 S&P500 지수옵션의 변동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른바 공포지수라고도 알려진 VIX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위 그림에서 보듯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VIX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즉 VIX가 크게 상승하는 시기에는 위험자산에 대한 회피 심리가 높아지고 원화 가치도 하락한다.
다만 VIX가 크게 하락하고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 원화 가치는 달러인덱스 즉 달러 가치의 변화에도 함께 영향을 받기는 한다. 즉 위 그림에서 보듯 2014년 후반부터 2015년 후반까지의 1년 기간 동안에는 VIX는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였지만 달러 가치는 상승했다. 이 기간 중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는 한국 정부가 특정 시기에 고환율 정책을 펴거나 저환율 정책을 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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