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전문 분야에 관해서 속보보다는 상세히 보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매체에 입사해서 준비도 없이 인공지능(AI) 분야를 담당하게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 지났다. 입사가 확정되고 이런저런 책도 보고 자료도 읽었지만, 막상 입사해서 일을 하면서 결국 고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만나서 고견을 듣는 것이 제일 빨리 배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서 입사하자마자 강도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과 단독 인터뷰를 하게 됐고, 이어서 오병일 진보네트워크 대표, 타이완 공정경쟁 당국 부책임자, 하정우 네이버 AI 이노베이션 센터장 등 쟁쟁한 전문가들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조금씩 이쪽 업계 상황을 배우는 엄청난 기회를 얻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매체는 업계 동향이 아니라 AI 제도와 규제 보도에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다가, 독자들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법조ㆍ규제ㆍ정책 담당자들이어서 인터뷰를 통해 들었던 내용을 모두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시간이 나면 언젠가는 기사에 담지 못했거나 "개인적인 느낌" 수준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써서 정리해 보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렇게 생각은 머릿속에 오랫동안 맴돌았지만, 내 글의 방향을 어떻게 정하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지금, 이 순간까지 깨달으면서 괜히 글을 쓰겠노라고 생각했다는 후회도 하게 됐다. 하지만, 기왕 고수들의 아까운 시간을 빼앗으면서 인터뷰를 핑계로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떻게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 소속 회사의 입장과 관련이 없는 사견임)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이 하필 서울에서
사실 AI 이론 자체는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마련되면서 지금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AI 기술 혁신이 확산하게 된 데는 생성형 AI의 위력이 소스 공개 전략에 따라 전 세계 자본가와 경영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쉽게 다가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문가들끼리만 알아보는 논문으로만 등장했거나 "혁신적이긴 한데 그걸 어디에 쓴다는 거야?"라는 의문을 불식시키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확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퍼스트 무버' 전략을 취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은 대한민국이 남들보다 먼저 AI 부문에 관한 전략을 수립하고 R&D와 인재 양성 부문에 투자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할 때도 통하는 이야기다. 즉, 이론에만 머물 뻔했던 AI의 위력이 한국인이라면 (지금은 아니겠지만) 익숙한 바둑 대결을 통해 우리 눈앞에서 입증되는 사건이 서울에서 벌어진 것이다.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가 개발한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9단에 4 대 1로 승리하면서 대한민국 전체는 AI가 더 이상 논문 속이나 연구실 안에서만 통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점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정부나 국회 등 정책 결정권자들도 AI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점을, 아니 이미 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고, 결국 한국은 AI에 대한 투자를 서두르게 된 것이다.
다시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과거와는 다르게 남들보다 먼저 치고 나가는 듯했던 대한민국의 AI 경쟁력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많은 나라에 밀리는 모습이 역력하고, 최근 정부 정책은 다시 우리에게는 낯익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에 매달리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EU 회원국과 글로벌 주요 경쟁국의 연구 및 혁신 성과를 정량화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지수를 개발해 분석한 ‘유럽 혁신 스코어보드 2024(European Innovation Scoreboard 2024)’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EU 평균 수준을 100으로 놓았을 때 한국의 혁신지수는 119로 평가돼 캐나다(115), 미국(107), 호주(106)에 앞선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EU 평균을 100으로 놓고 평가한 한국의 혁신지수는 2017년 128에서 2019년 137까지 상승했다가, 이후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항목 가운데 2017년보다 크게 지수가 하락한 부문은 '다른 주체와 협력하는 혁신적 중소기업', '사업 공정 혁신을 갖춘 중소기업', '환경 관련 기술', '제품 혁신을 갖춘 중소기업' 등으로 조사됐다.
하정우 네이버 AI 이노베이션 센터장은 이에 대해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최근 대규모 재정 및 금융 지원안을 발표하면서 AI 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펴면서 한국의 기술 수준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도 이에 맞서 대규모 지원을 하면 좋겠으나, 솔직히 그럴 분위기도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작다.
'동메달도 감지덕지' 신세
정부는 AI 반도체, 자체 LLM 개발, 자체 클라우드 서비스 시행, 플랫폼 정부 프로젝트 등에서 확보한 국제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AI 부문에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목표를 설정하면서 달성 가능성을 언급하는 목소리에 날이 갈수록 다급한 느낌이 묻어나는 것이 최근 상황이다.
올림픽에 나갈 국가대표를 선발하면서 국내 언론에 '메달 색깔' 운운하다가, 막상 본선이 시작되고 경기가 진행되면서 '동메달도 감지덕지'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고, '이변'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상황과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한국은 왜 정부가 대규모 지원을 하면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을까? 하정우 센터장이 자신의 책에서 지적했듯이, 그리고 위 EU 보고서에 나타나 있듯이, 한국은 중간급에 해당하는 독립적 혁신 기업이 거의 없다. 없다는 표현이 섭섭할 수 있겠으나, 중소 혁신 기업이 있으려면 그 전에 수많은 '이름도 없고 기업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시도들이 있어서, 그들 가운데 대부분 실패하고 살아남은 시도들이 중소 혁신 기업이 되어야 한다.
이게 한국에서는 안 된다. 하정우 센터장 표현대로라면 한국에서는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처벌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하고도 그 도전이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고,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고 파트너가 바뀌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풍토가 없는 것이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로부터도 '실패할 수도 있으니 해 봐라'라는 말보다 '그 좋은 일자리 놔두고 실패하면 어쩌려고 무모한 짓을 하느냐'는 말을 밥 먹듯 들으며 실패를 감수한 시도를 하기는 쉽지 않다.
'혁신 독립 기업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찌어찌 대기업, 어찌어찌 재벌기업이 간혹 실수로 혁신적인 일을 저지른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 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쥐를 잡으니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재벌기업으로서는 사실 이런 혁신적인 시도가 아니더라도 먹고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안 하는 사업이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사업을 하는 가운데 '총수 일가 입장에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 절실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얼떨결에 일구어낸 혁신을 이어가기 어렵다. 한두 번 우연히 성공한, 그러기에 초보적일 수밖에 없는 혁신 성과에 임원진과 총수 일가는 '내 덕이다'라면서 숟가락 얹기에 바쁘고, '더 투자해야 한다'는 실무진 목소리는 묻힌다.
정부나 정치권도 기업에 직접 지원하는 정책을 선뜻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정권을 거치며 각종 정경유착 사건이 터지고 대기업 대주주 일가는 한두 명쯤 사법처리를 피해 갈 수 없었으며, 정권 교체가 일상이 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업은 지원의 대상이라기보다 때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태다. 대기업을 때릴수록 지지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급기야 최근에는 전문가 그룹 때리기에 나선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관료 집단과 전문가 집단 사이의 협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관료 집단은 정책을 수립하고 정책 집행 방법을 강구해 국민을 설득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왔고, 이들을 뒷받침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관계가 깨지게 된 것이다.
이제 정부가 하려는 일에 제대로 된 기업가나 전문가는 선뜻 나서려 하지 않고, 제대로 된 기업가나 전문가가 제안하는 사업에 힘을 실어 줄 관료나 정치 세력은 찾기 어려워졌다. 이럴 때 자본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엄정하게 사업이나 기업을 분석해서 제대로 된 곳으로 자본이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데, 한국 자본시장은 아직 그런 기능을 하는 데 미숙하다.
역사상 최약체에 해당하는 여당과 역사상 최저 지지율을 기록 중인 대통령이 역사상 가장 창의적으로 대처해야 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