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럼비아대학 교수의 글 『American Delusions Down Under』를 번역해 소개한다. 이 글은 호주의 토니 애보트 총리가 미국 경제 제도를 숭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다. 호주 상황에 대한 글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 소개한다.
유럽의 경제적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아시아 신흥국들이 20세기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식 경제제도가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미국식 정책은 세계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 교수의 지적대로 미국식 경제제도라는 것은 실상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 어렵다. 부의 불균등 심화, 금융위기의 상시화, 교육 제도의 붕괴, 의료 제도에 대한 신뢰 저하 등 많은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식 경제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정치적 논쟁으로 변질되거나 마땅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아 대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스티글리츠 교수의 지적에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미국식 제도를 전부 다 배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국식 제도든 무엇이든 충분하고도 개방적인 국민적 논의를 거쳐 도입돼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고속도를 건설하려 할 때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고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복지, 학교급식, 토목건설 축소 등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도 차분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거치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정치권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져 아쉬운 감이 있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글이 이런 문제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에서 진행되는 경제정책 관련 논의는 그것이 각자의 상황에 적합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는 긍정적인 때도 있고 부정적인 때도 있다. 최근 재집권에 성공한 토니 애보트 호주 총리 정부가 이와 관련해 아주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어느 나라든 보수당 정부는 재정적자는 미래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정부 지출 감축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 어느 나라보다 호주에서 가장 안맞는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보트 정부는 그런 주장을 수용하는 듯하다.
하버드 경제학자인 카르멘 라인하르트와 케네스 로고프는 공공부채가 너무 높으면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이 주장은 확실히 입증되지 않았으며 결국 최근 신뢰를 잃기도 했지만, 설령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호주의 경우와는 들어맞지 않는 주장이다. 우선 호주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낮고 OECD 회원국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중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교육, 기술, 사회간접시설 등에 대한 핵심 공공 투자가 여기에 들어간다. 더구나 이러한 투자는 궁극적으로 부유한 가정 출신이든 가난한 가정 출신이든 모든 국민이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데 필수적이다.
애보트 총리가 각종 "개혁" 조치라고 내세우는 것들을 옹호하면서 미국식 경제 모델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미국식 경제 모델이라는 것은 사실 미국인 대중들에게는 제대로 작동하는 데 실패했다. 약 4반세기 전과 비교해 오늘날 미국인의 소득 중간값은 더 낮다. 그 이유는 생산성 정체가 아니라 임금 정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호주식 경제 모델은 사실 미국보다 훨씬 잘 작동해 왔다. 호주는 원자재 생산국이면서도 이른바 자원의 저주에 빠지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경제발전의 혜택이 비교적 고루 분배되기도 했다. 지난 수십년간 호주의 가계소득 중간값은 연평균 3% 넘게 증가해 OECD 평균의 2배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했다.
물론 호주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풍부한 천연자원 보유량을 감안할 때 호주는 부의 불균등 정도를 더욱 개선할 여지가 있다. 한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천연자원은 모든 국민들에 속하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지대"는 결국 부의 불균등을 완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천연자원으로부터 얻어지는 이득에 고율의 세금을 매긴다고 해서 저축이나 근로소득에 세금을 매길 때와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철광석이나 천연가스 부존량에 세금을 매긴다고 해서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가 호주의 경우 노르웨이보다 3분의1 정도 높다. 노르웨이는 자원 부국이면서 국가의 부를 모든 국민들을 위해 잘 관리한 대표적인 국가다.
이쯤 되면 실제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애보트 총리와 그의 정부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1970년대에 규제완화 및 자유화 조치가 대대적으로 시작된 이래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급격히 낮아졌고 그나마 성장의 과실은 주로 부유층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이러한 각종 "개혁"이라는 조치 이전 최소한 50년간 미국에서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적이 없으며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금융위기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각종 규제완화 조치로 인해 금융 부문은 과도하게 팽창했으며 많은 젊은 인재들이 보다 생산적인 부문에 취업하지 않고 금융 부문으로 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금융산업의 혁신 덕분에 금융업계는 극도로 부유해졌지만 미국과 세계 경제는 붕괴 직전에 처하게 된 것이다.
호주의 공공 서비스는 세계적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호주의 보건 시스템은 미국보다 비용은 적게 발생시키면서도 높은 성과를 내고 있다. 또 호주는 소득 조건부 교육 관련 대출 프로그램을 시행 중인데 그에 따라 돈을 빌린 사람은 필요한 경우 상환 기간을 장기로 설정할 수 있으며 소득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경우(예컨대 교육이나 종교 같은 중요하지만 보수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 정부는 채무의 일부를 탕감해 주기도 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현실은 충격적이다. 현재 미국의 학생 채무는 1조2천억 달러가 넘어 전국 신용카드 부채보다 많으며 졸업생은 물론 경제 전반에 큰 부담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이 선진국 가운데 기회의 균등 정도가 가장 낮아지게 된 이유로 이처럼 실패한 고등교육 금융제도를 들 수 있다. 그에 따라 미국의 경우 젊은이의 미래가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부모의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에 달려 있게 된 것이다.
애보트 총리는 또 미국의 고등교육제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미국의 주요 대학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진짜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등을 성장시킨 것은 가격경쟁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었다. 미국의 위대한 대학들 가운데 영리 기관은 한 곳도 없다. 이들은 모두 비영리 기관으로 공공 부문이나 막대한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물론 미국 대학들 사이에도 경쟁은 치열하다. 그러나 이들이 경쟁하는 목표는 포괄성과 다양성이다. 이들은 정부의 연구 보조금을 위해 경쟁한다. 미국에도 규제가 덜 미치는 영리 대학이 있지만 이들이 정말 잘 하는 일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젊은이들을 착취하고 정부의 각종 보조금을 위해 로비를 벌이는 일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주는 정말 자신들이 이룩한 성공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세계가 배울 점도 많다. 미국의 실상을 잘못 이해한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가세해 정치 지도자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 제도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것이라면 이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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