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에 블로그에 소개했던 글인데 블로그 독자가 늘기도 했고 문득 개인적으로 다시 들여다볼 기회가 있어 다시 소개한다. 아래 소개한 내용은 최근 그리스 전 총리도 적극 주장하는 글을 Project Syndicate에 기고한 바 있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4년 미국 등 연합국들이 모여 전후 국제금융 질서를 새로 수립하고자 달러와 금을 연동시키고 다시 다른 나라 통화를 달러에 연동시키는 방식의 체제에 합의했고 이를 브레튼우즈체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1971년 미국이 달러와 금과의 연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새로운 통화질서를 수립하지 못한 채 세계는 여전히 달러를 거의 절대적인 기축통화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후 여러 차례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급기야 2008년에는 가장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던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해 전세계가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일본 등 기존 선진국들은 물론 중국과 브라질 한국 등 신흥국들이 함께 모여 정책 공조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 G20 협의체는 위기감이 잦아들면서 명맥만 남게 됐고 새로운 국제 경제 및 금융 질서 수립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의 달러 중심 통화질서의 가장 큰 문제는 달러가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통화인 동시에 세계의 기축통화라는 점과 함께 달러의 가치에 영향을 줄 정책을 미국이라는 한 나라가 전담하고 있지만 이를 간섭할 국제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미국 경제가 어려워져도 달러 수요가 늘고, 심지어 미국이 금융위기를 일으켜도 달러 가치가 올라가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경상수지가 확대돼도 미국은 채권을 맘놓고 발행해 유통시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브레튼우즈체제 수립시 케인즈가 주장했지만 채택되지 못한 국제청산동맹(ICU) 및 그 일부라고 할 국제통화 방코(또는 방코르ㆍbancor)의 원리가 새삼 눈길을 끈다. 경제를 전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나로서는 최근 『The Age of Oversupply』라는 책을 읽다가 비로소 내용을 접하게 됐다. 혹시 아직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책에 소개된 부분을 정리해 공유한다.
▣ 방코는 세계 중앙은행들끼리 결제할 수 있는 화폐로 세계 모든 화폐의 가치는 방코와의 상대 환율로 표시된다. 방코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는 없다. 케인즈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과 개념은 유사하지만 기능과 용도는 훨씬 광범위한 것이었다.
▣ 당시 고전적인 금본위제는 실시할 수 없었지만 그 취지를 고려해 케인즈는 무역 위기 예방에 필요한 국제 환율 안정을 확립할 수 있는 세계 표준 화폐를 고안한 것이다. 달러를 금에 연동시키고 각국 화폐를 다시 달러에 연동시키는 문제는 금의 공급이 제한적인 것 등의 문제 때문에 미국에 큰 압력을 가하게 되었고 이후 미국은 결국 달러의 금 연동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케인즈가 생각한 방코는 그런 제약은 없었다.
▣ 케인즈는 방코 자체가 신용화폐지만 각국이 자국의 무역 결제 규모를 감안해 적정량의 방코를 보유할 수 있게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 방코와 각국 화폐의 환율은 상대구매력평가(PPP) 수준에 의해 결정되도록 고안됐지만 당시에는 국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PPP 계산이 여의치 않았으며 이것이 케인즈가 주장한 ICU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 나라마다 경제 팽창 속도가 차이가 있으므로 각국이 보유할 수 있는 방코의 양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방코 보유량을 각국이 마음대로 늘릴 경우 국제적 불균형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케인즈는 무역수지 적자국의 경우 적자액만큼의 방코 초과인출(OVERDRAFT)를 계상할 수 있게 하되 각국의 초과인출 상한액은 무역 규모에 비례해 설정하도록 고안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어떤 나라도 무역수지 적자를 계속 낼 수 없으며 (즉, 수입을 계속 늘릴 수 없으며) 어떤 시점이 되면 국내 수요를 국내 생산으로 충당해야 하는 것이다.
▣ 1940년대 당시에 이미 케인즈는 무역수지 불균형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역수지 적자국 입장에서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시장에서 불균형이 조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큰 폭의 환율 절하를 통해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을 선호하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흑자국의 경우 자국 통화의 절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 이를 감안해 케인즈는 ICU가 흑자국에는 통화 절상을, 적자국에는 통화 절하를 강제로 시행토록 하는 권한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연간 무역수지 흑자액이 사전 설정된 방코 초과인출 상한액의 50%에 달하면 그 나라 화폐는 인위적인 절상을 실시하는 동시에 흑자액의 10%에 상당하는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 반대로 적자국의 경우 적자액이 초과인출한도 50%에 달하면 자국 화폐를 절하해야 하며 초과인출액에 비례해 일정액의 이자를 ICU에 지불해야 한다. 이런 각종 규정은 강제성을 띄며 규정을 어긴 나라는 ICU에서 퇴출돼 결국 국제무역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위에 언급한 책 소개 글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 (책소개) 공급과잉의 시대: 금융위기 근본 원인 처방 없이 진정한 위기 극복은 비관적)
(맨 아래 그림은 이 책에서 ICU 및 방코 제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각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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