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의 사견이며 소속 회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음.)
이달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기준금리를 15개월 만에 처음으로 인하했다. 7명의 위원 가운데 1명이 동결을 주장했고 나머지는 인하를 주장했다. 이주열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소비 및 투자 심리 악화가 심화되면 앞으로 실물경제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마침 인플레이션이 낮은 상태여서 금리를 인하했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실물경제 상황이나 향후 실물경제 전망에 있어서 실제 악화가 확연히 예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번 금리 인하가 단행되기까지 지난 4개월간의 상황 변화는 극적이었다. 이 총재는 전임자 시절 한국은행의 중립성과 대외적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에 동의하면서 이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표명했다. 그런데 취임 후 불과 4개월 여만에 단행된 이번 금리 인하가 정부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최근 그의 경제 및 정책에 대한 시각은 급변했고, 더구나 그 변화가 정부 시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금리 인하를 정부와의 정책공조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정부 압력에 대한 한국은행의 굴복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사실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국가 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지원할 책무가 있는 한국은행으로서는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금리를 인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 경제의 건전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정부 정책과 공조를 이루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사실 '공조'와 '압력에의 굴복'은 그리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금리를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한국은행으로서는 정부 압력이 있든 없든 금리를 인하해야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정부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들의 경제 및 정책에 대한 견해를 한국은행 쪽에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을 시장이나 국민들이 볼 때 압력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정교한 방법으로 현명하게 실행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금리 인하가 정부 압력에 대한 굴복이라는 견해가 나오는 것은 정부측 인식이 먼저 변화했고 그 이후 한국은행의 인식이 그에 따라가는 모양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오석 전 기획재정부장관이 교체되지 않았고 현재 경기 상황이 대대적 완화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면 기준금리는 인하됐을까라고 물어보면 쉽게 상황이 이해될 것이다. 혹은 최경환 신임 장관이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면 금리 정책도 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거시경제 지표상으로는 기준금리가 2.25%까지 인하돼야 할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동의하기 힘들다. 전분기대비 성장률은 2/4분기에 0.6%로 부진했지만 3/4분기에 성장률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민간소비가 감소했지만 일시적 현상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연간으로 보면 올해 성장은 3.7% 이상 될 것이고 내년에는 4%까지 회복될 것이다. 한국 경제의 세계적 위상을 볼 때 이만한 성장률은 높은 편에 속한다.
기준금리는 지난 2008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세계 경제가 대공황을 우려할 정도의 혼란에 빠졌을 때 2.0%까지 인하됐다. 이제 한 차계 더 기준금리가 인하되면 그 당시 수준과 같아지는 것이다. 이번 금리 인하 배경으로 "심리" 이외에 다른 요인을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점은 은행 여신 동향을 봐도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999년 기준금리를 도입한 이래 은행 여신 증가율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금리를 인하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은행대출 증가율(전년동월대비, 3개월이동평균)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기준금리가 인하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
금리 인하란 기본적으로 차입비용을 낮춰 대출을 촉진하는 효과를 갖는다. 즉 경기가 좋지 않아 돈에 대한 수요가 부족할 때 이를 적정한 수준으로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여신 증가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국은행 출신인 노무라의 권영선 이코노미스트는 "전례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대대적인 정책 완화 선회가 아니었으면 금리 인하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는 한국은행의 중립적 정책 결정 여부에 대한 의심은 남게 된다.
그런데 한국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말 자체는 어찌 보면 구조적으로 이미 성립하기 힘든 개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한국은행은 지난 1998년 법 개정을 통해 금통위 의장직을 차지하게 됐으며 금통위에서 정부 관료를 배제하는 등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됐다. 그 대신 은행감독원을 포기했다. 구조적으로는 금통위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예산은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며 금통위원은 퇴임 후 진로와 관련해 정부 쪽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언론 및 시장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도 절대적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한국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말은 사실 생각만큼 대단하거나 명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 투자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그러려면 차라리 김중수 총재처럼 드러내놓고 정부와 협력한다고 시인하는 편이 낫겠다"는 말까지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국은행이든 정부든 얼마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수립하고 그 입장을 금융시장과 경제주체들에게 전파하느냐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경제 부총리가 "일본식 장기불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위기의식을 고양하는 것이나 중앙은행 총재가 3개월 전에 했던 말이 실수었다는 식으로 입장 변화를 설명하는 것 등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여러 가지로 지난 4개월 간의 거시경제정책 수립과 전파 과정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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