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학파, 다시 말해 경제발전 혹은 쇠퇴의 원인을 제도적 요인에서 찾는 학자들에 대해 잘 몰랐는데, 명지대 김두얼 교수 덕분에 역사적인 논문 한 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노스와 웨인게스트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이 논문에서 명예혁명이 영국정부의 자의적인 재산권 강탈을 막음으로써, 장기적인 투자활동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주장을 펼치는지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명예혁명이 영국 해군을 만들었다?
명예혁명 이전 영국 왕실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린다거나, 돈을 받고 특허권이나 귀족 작위를 마구 발행했고 심지어 은행가들에게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는 일을 반복했었다. 청교도 혁명은 왕실의 자의적인 재산권 침해에 대해 의회가 반발하며 일어난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왕정복고 이후 부활한 스튜어트 왕조도 같은 문제를 일으키자, 1688년 명예혁명으로 두 번째로 왕을 내쫓은 뒤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을 왕으로 모셔오는 대신 그에게 ‘의회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노스와 웨인게스트는 명예혁명과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 왕실은 재산권을 위협할 경우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왕실이 더 이상 자의적으로 국회의 동의 없이 국민의 재산권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어, 의회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것은 물론 장기투자의 가능성을 높였다는 게 노스와 웨인게스트 주장의 핵심이다.
아래의 ‘그림’은 잉글랜드의 국채금리 변화를 보여주는데, 명예혁명 이후 큰 폭으로 하락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 입장에서, 예전보다 돈을 떼일 위험. 다시 말해 신용 위험이 크게 하락했기에, 이전보다 낮은 금리라도 얼마든지 돈을 빌려주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 셈이다.
금리의 하락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잉글랜드 해군이었다. 해군은 이른바 ‘돈 먹는 하마’에 속하는 군대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투입된다. 명예혁명 이후 낮은 금리도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잉글랜드는 해군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한 숱한 도전 속에서 승리해 결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림 설명: 잉글랜드 국채 발행 금리의 변화를 1540년부터 1800년까지 측정한 것으로, 명예혁명(1688)년) 이후 금리가 극적으로 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음.) |
왜 다른 나라는 금리를 못 떨어뜨렸을까?
이 대목에서 한가지 의문을 가지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잉글랜드가 명예혁명 이후 저금리에 힘입어 거대한 해군을 창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다른 나라는 왜 모방할 수 없었는가? 이에 대해 최근에 읽은 책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58 페이지).
경제성장은 기존의 정치/경제질서를 바꾸어 권력이 재배분되게 하고 새로운 승자와 패자를 만든다. 현재의 기득권자가 미래의 바뀐 질서에서는 계속 승자로 남지 못할 수 있으므로 불확실성이 커지는 셈이다. 사회의 기득권층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의 변화로 야기될 기존 질서의 파괴를 우려해, 제도 개선을 반대하고 이를 방해하는 성향을 가진다.
산업혁명 초기에 철도의 건설을 방해했던 당시 기득권층의 행태는 유명한 사례다. 영국에 철도를 최초로 건설하려 할 때, 이미 운하를 파서 범선을 운행하던 사업자들은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해 격렬히 반대했다. 유럽대륙에서는 철도건설을 추진하자 군주나 귀족들이 반대한 사례도 있다.
19세기 초에 오스트리아의 집권층이 “우리는 대다수 대중이 더 잘살거나 독립적으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라며 철도 건설에 반대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7세기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 3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 없이 전쟁의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그만큼 유럽은 ‘부국강병’이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적 가치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명예혁명 이후 국가시스템을 혁신하고 막강한 해군을 건설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던 귀족들이야 말로, 오스트리아 제국 해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을 만들면 무엇 하나? 출판이 안 되는데!
전쟁을 매일처럼 치르던 유럽의 오스트리아 조차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진대, 조선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8~9페이지).
1652년 반계 유형원은 전라도 부안에 칩거하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철저히 무너진 조선의 제도를 복원하고 나라를 재건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8년간 심혈을 기울여 ‘반계수록’이라는 대작을 완성한다. ‘반계수록’은 17세기 후반에 조선 제도 전반에 대한 분석과 개혁방안, 즉 ‘국가개조론’을 제시한 매우 체계적인 역작이다.
여러 학자와 관료들이 숙종과 영조 등 여러 임금에게 ‘반계수록’을 제출하며, 출판하여 널리 읽히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계속 무시 당했다. 관료와 학자들이 두루 읽고 정책에 반영하려면 마땅히 인쇄하여 출판해야 하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출판해달라는 단순한 건의조차 수용하지 않았다.
‘반계수록’이 인쇄된 것은 책이 저술되고 10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나마 목판으로 인쇄하여 정부 서고에 비치했을 뿐이다. 이것이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인쇄술이 발달했던 조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중략)
왜 조선의 지배층들은 ‘반계수록’의 내용을 널리 소개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꺼렸는가? 유형원의 제도개혁안이 지배층의 이익과 배치되었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출판되는 것까지 방해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연구한 결과, 인쇄와 출판을 국가가 직영하고 양반 사대부 계급이 지식을 독점하는 체제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막고 지식을 독점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상류계급이 변화에 저항하는 것만큼 뚜렷한 쇠퇴의 징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쓰라린 근대사가 주는 교훈을 부디 잘 살렸으면 하는 맘이다.
▶ 블로그 글 원문: http://blog.naver.com/hong8706/22096312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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