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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은 묘약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도에서 보면 서울 바로 외곽이지만 전기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고 집에서는 스무 살까지 펌프로 물을 올려 사용할 정도로 낙후된 상태였다. 물론 학교나 다른 시설에서 펌프로 물을 올려 본 경험을 일시적으로 해 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펌프로 물을 올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펌프로 물을 올리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펌프 상태, 펌프 아래 고여 있는 물의 양이나 상태, 펌프질 하는 사람의 기술 등 여러가지 요인 때문에 자연스럽게 펌프질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해 본 사람은 안다.

여기서 펌프질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고 드는 생각이 있어서다. 정부 발표문에 '마중물'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자주 사용됐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정부 웹사이트에서 검색해 본 결과 2008년 1월 "농림부 직원들의 작은 정성이 9개 마을의 홀몸어르신(독거노인)을 돕는 사랑의 마중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번에는 장수(영정)사진입니다"라는 글이 눈에 띈다.

그 무렵, 그리고 그 이후 정부에서는 '마중물'이라는 단어를 무슨 대단한 새로운 정책수단인 것처럼 즐겨 사용하고 있다. 2009년 3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최대 정책 목표는 첫째도 일자리 , 둘째도 일자리입니다"라면서 "국민의 혈세가 이웃을 돕고 경제를 살리는 마중물이 되도록 반드시 귀중하게 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이 단어는 심심치 않게 사용돼 왔다. 문재인 정부가 7월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보면 "민간이 만들어갈 일자리의 마중물로서 공공부문에서 81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라는 문장이 포함돼 있다.

마중물은 펌프에서 맑은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한 바가지의 물로, 길어 올리는 큰물을 마중 나온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좀 더 전문용어식으로 설명하면 마중물은 펌프의 시작 전 내부의 공기를 배출하고 물을 채워 양수되지 않는 것을 방지하는 것 또는 그 물을 의미한다.

결국 정부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재정에서 돈을 지불해 민간의 대응을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마중물이 한 바가지의 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펌프질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경우 마중물은 그냥 허망하게 물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생각보다 많은 마중물을 부은 뒤에야 겨우 물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또, 마중물을 부어 물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펌프질 기술이나 땅 속의 우물 상태에 따라 물이 다시 끊기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마중물 5바가지에 겨우 1바가지 물밖에 올리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마중물을 부을 때는 그만큼 여러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고 난 뒤 마중물을 언제 부을 것인지, 얼마나 부을 것인지, 실패할 경우 더 부을 마중물은 있는지, 펌프질은 누가 할 것인지 등등 수많은 조건을 잘 파악해야 의도한 바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중물을 붓는다고 다 물이 끌어올려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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