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미국에서 반도체가 개발된 직후 제조 기술을 이전받아 이를 활용한 개인용 전기 전자제품을 생산하면서 1980년대 중반에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일본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본 정부의 정책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최초로 발명한 미국에서는 초기에 반도체를 대부분 국방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조 기업의 주요 고객은 미국 정부였다. 따라서 미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들은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한편 일본 기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무기 개발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도체를 활용해서 개인용 전기·전자 제품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반도체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고, 다수의 전자제품 생산 기업이 자사 제품에 반도체를 채용하기 위해 생산하면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일본의 산업정책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외환 규제를 통해 수입을 막으면서 수출을 촉진하는 전략이 주로 이용되었다. 반도체산업 역시 일본 정부가 자국 기업 제품의 수출은 늘리고 미국산 제품의 수입은 철저하게 방어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1980년대 중반에 드디어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일본과의 불공정 거래를 해소하기 위해 슈퍼 301조를 발동하고 미·일 반도체 협정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반도체산업 발전에 제동을 걸었다. 이후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현재 시장 점유율 10% 미만으로 추락한 상황이다. 물론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으나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미국을 선두로 기존의 반도체 선진국들이 공급망 안정화를 이유로 자국 내 반도체 제조 설비 유치에 적극적으로 일본 정부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산업 초기부터 제조 장비와 소재 분야도 함께 발달하여 현재 후공정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 부활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이 과열될 뿐만 아니라 제조 장비와 소재를 공급받고 있는 국내 반도체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산업연구원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쇄 전 과정을 잘 정리하고 현재 산업 부흥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정책적 노력, 그리고 한국 업계에 제공하는 시사점 등을 담고 있는 보고서(『일본 반도체산업 부침과 부흥 노력 및 시사점』)를 발간했다. 여기서 주요 내용을 공유하고 맨 아래에 보고서 링크를 소개한다.
특히, 이 보고서는 50여년 전에 벌어진 일까지 잘 정리하고 있어서 최근 동향에만 집중하면서 갖게 된 궁금증이 있다면 이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반도체·디지털산업 전략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반도체 공급망에 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발명된 반도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제조 공정별로 전 세계에서 경쟁력 있는 국가들이 담당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형성되었다. 그중에서 제조 분야는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글로벌 반도체 부족 현상을 겪은 미국을 비롯하여 EU, 일본 등이 반도체 제조 시설을 자국 내로 유치하기 위한 정책들을 앞다투어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2000년대 초반 반도체산업 정책 실패 이후 반도체 관련 정책을 별도로 발표하지 않았으나, 2021년 6월 경제산업성에서 ‘반도체 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고 스가 내각이 반도체 전략을 ‘성장전략’에 담아 각의에서 결정했다.
경제산업성에서 발표한 반도체 전략으로는 첫째로 첨단 반도체 양산 체제 구축, 둘째로 차세대 첨단 반도체의 설계·개발 강화, 셋째로는 반도체 기술의 그린이노베이션, 넷째로 국내 반도체 제조 기반 재생, 다섯째로는 경제 안전보장 관점에서의 국제전략 추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첨단 반도체 양산 체제 구축을 위해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대만 기업인 TSMC를 유치했고 이를 위해 추경예산을 편성하여 TSMC의 설비투자 금액의 약 50%까지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지원 정책에 따라 TSMC 제1공장은 2022년 착공하여 올해 12월에 제품 출하를 시작할 예정이며, 제2공장도 올해 초에 착공하여 2027년 하반기에 제품을 출하할 예정이다. 외국 기업을 유치하여 일단은 국내 반도체 제조 기반 재생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6월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지털산업 전략을 개정하였는데, 개정 이유로 2021년 최초 수립 이후 2년이 지나는 가운데 세계 정세가 시시각각 변화하고 경제 안보 리스크 및 디지털화 친환경 대응의 중요성이 높아지며 관련 분야의 포괄적인 대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했다. 반도체 분야의 개별 전략 중 주요 내용은 첫째, 2030년까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업의 반도체 부문 합계 매출액 15조 엔 이상 달성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며, 둘째로 첨단 로직·메모리 반도체, 산업용 특수용도 반도체, 첨단 패키지, 제조 장치와 부품 소재별 등에 대해 3단계 전략을 추진해 2030년대에는 실용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특히 첨단 로직 반도체 분야 제조 기반 확보와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산업 부활 움직임
일본은 한때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면서 건설한 반도체 제조 공장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이 구형 제품, 즉 레거시 반도체 생산 설비이다. 이는 지난 20년 이상 일본의 경기 침체와 더불어 반도체 제조 공장에 대한 신규 투자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 대만 TSMC에 대한 투자 지원 발표 이후 자국 기업인 키옥시아와 미국의 마이크론도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규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TSMC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투자를 유치한 목표는 명확하다. 지난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같은 일이 재발하더라도 소니를 비롯한 덴소 등 일본의 반도체 수요기업들이 차질 없이 반도체를 공급받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난 수십 년간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낙후된 기술을 보완하기 위하여 외국 기업을 유치한 것이다. 게다가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제조 공장을 건설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와 함께, 반도체 제조에 가장 필요한 웨이퍼뿐만 아니라 제조 장비와 소재 등의 50% 이상을 일본산 제품 사용을 추구함에 따라 후방산업의 경쟁력을 계속 강화하겠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일본의 반도체산업 정책은 경쟁력이 약한 첨단 반도체 생산 설비 구축과 동시에 경쟁력이 높은 제조 장비와 소재 분야도 함께 지원하는 전략이다. TSMC 제1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일본 수요 기업에 맞추다 보니 최첨단 공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제2 공장에서는 10nm 이하의 공정을 도입하기로 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와 토요타, 키옥시아, 소니,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 UFJ은행 등 일본 주요 기업 여덟 곳은 지난달 공동으로 출자해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하면서 최첨단 공정인 회로 선폭 2nm 이하의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최첨단 2nm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는 라피더스는 홋카이도 치토세시에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홋카이도는 제조업 비중이 9.9%에 불과해 국내 평균(20%)의 절반 수준으로 라피더스는 홋카이도의 산업구조를 크게 변화시킬 게임 체인저로 기대되고 있다. 라피더스의 코이케 아츠요시 사장은 도마코마이시-삿포로시-이시카리시 일대 첨단산업의 집적을 도모하는 ‘홋카이도 밸리’ 구상 계획에 대한 포부를 표명한 바 있다. 그리고 TSMC의 세 번째 공장이 홋카이도에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홋카이도가 주목받고 있다.
미·일 반도체 협력
일본의 반도체산업 발전을 저지했던 미국이 최근 일본의 반도체산업 부활 움직임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디지털산업 전략에서 ‘경제 안전보장 관점에서의 국제전략 추진’을 한다고 했는데 대만의 TSMC와의 협력뿐만 아니라 반도체산업 재건을 위해 과거 반도체 분야에서 갈등을 빚었던 미국과도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2022년 7월 워싱턴에서 열린 외교·상무 장관의 ‘2+2 경제 대화’에서 차세대반도체 개발에 협력하기로 합의했으며, 일본에 미·일 차세대 반도체 공동 연구센터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개발, 일본은 제조 장치와 재료에 강점이 있다”라면서 “양국이 서로 보완해 첨단 제품을 개발함으로써 대만 의존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가 있다”고 분석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2022년 11월 한 경제포럼에서 “지난 5월 14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안에서 일본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 협력”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시사점
일본의 반도체산업은 성장부터 쇠퇴까지 전 주기를 경험했고 최근 부활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반도체는 미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일본 기업이 빠른 속도로 추월했는데 이는 일본의 종합전자제품 제조 기업들이 자사 전자제품에 사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개발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도체산업 초기에는 다양한 전자제품에 필요한 제품을 개발하여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으나, 점차 내부 거래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 전자제품업체들의 경영 실적이 악화됨에 따라 반도체 분야도 함께 쇠퇴하게 되었다.
일본의 반도체산업은 제조 장비와 소재 분야도 함께 발달했는데 이는 일본 기업은 반도체 초기 제품인 트랜지스터부터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다수의 전자업체가 참여하면서 제조 장비와 소재도 함께 개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정부도 1980년대 반도체산업을 육성하기로 결정한 이후 제조 장비 및 소재 기업에 대한 지원도 함께 진행하여 현재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의 반도체산업 흥망성쇠에 미국 정부가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경제 발전을 지원했고 일본 기업의 반도체 생산을 견제하기보다 저렴한 일본 제품 구매를 확대하며 일본 경제 성장을 지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일본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미국을 추월하고 무역수지 적자 폭이 커지자, 일본 반도체산업을 견제했고 그 결과 일본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은 일본 반도체산업의 부활 움직임에 기술 협력 등 지원을 하고 있다. 이는 현재 반도체 제조업이 한국과 대만 등 특정 국가에 집중되어 있어 이를 분산시키기 위한, 즉 기정학적 목적으로 미·일 반도체 협력이 재개된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응하여 한국은 일본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한국은 이전 일본의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대체했으며, 최근 파운드리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어 일본 반도체산업의 부활로 새로운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과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지금까지 구축해 온 공급망이 무너지면 양국 기업 모두에게 손해이므로 협력관계 유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일본은 반도체산업 부활을 위해 미국, 대만 등과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일본에 R&D 센터를 설립하는 등 기존의 수직 협력과는 다른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으므로 한국과 일본은 과도한 경쟁 관계를 구축하기보다는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상호 반도체산업이 발전하는 방안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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