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오랜 동안 디플레이션 위험보다는 인플레이션 안정이 더 강조돼 왔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의례 강조하는 것도 일자리 창출과 함께 물가안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생각보다 오랜 기간 동안 약세를 보이고 있고 국내 소비 및 투자 수요는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원화환율도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어 인플레이션율은 십수 년 만에 최저치인 1% 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이웃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경제에 있어 불안정한 인플레이션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 디플레이션이다. 물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다고 해서 곧바로 그 나라가 디플레이션에 빠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으나 대개 "경기가 하강하면서 물가도 하락하는 경제현상"을 디플레이션이라고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디플레이션을 "2년 정도 물가하락이 계속돼 경기가 침체되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수요부진 또는 광범위한 공급초과로 디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기업의 수익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불황을 맞게 된다. 인플레이션이 주로 초과 수요에 의해 발생한다면 디플레이션은 주로 초과 공급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즉 소비자의 구매력을 넘어서 공급이 이루어질 경우 초과공급이 생기면서 가격이 내려간다. 이렇게 되면 여타 자산가격도 하락하고 더구나 임금이 하락하면서 가계소득도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경우 아직 디플레이션 위험이 임박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생산성은 정체되고 고급 일자리 창출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제조업 전체에 설비 능력은 잉여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높은 가계부채와 자산가격 약세,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상황 등 때문에 소비지출을 억제하고 있다. 따라서 디플레이션 위험을 애초부터 배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플레이션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한국은행도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적정선으로 생각되는 수준으로 설정하고 실제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에 근접하도록 경제를 관리해 나가고 있다. 즉, 인플레이션을 목표치보다 높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낮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 정황상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의 지나친 둔화를 막기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중앙은행의 "소통"의 진정한 의미
사실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한국은행이 향후 인플레이션을 전망하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경제성장률이나 경상수지 등 다른 거시경제지표와 함께 인플레이션율 전망을 정기적으로 발표한다. 이 발표는 다시 각 경제주체와 투자자들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국은행의 물가상승률 전망은 다른 어느 기관의 전망보다 중요하고 또 그에 따라 경제정책도 수립ㆍ집행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장 한국은행의 2013년 연간 인플레이션율 전망이 제시되고 수정된 것만 봐도 놀라울 정도다. 2011년 12월 한국은행은 2013년 인플레이션을 3.2%로 전망했으나 이후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이를 하향수정해 올해 7월 전망시에는 이를 1.7%로 낮춰 잡았다. 이렇게 하는 동안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모두 세 차례 내렸으나 여전히 인플레이션은 낮은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경제의 회복세는 더디기만 하다.
물론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만 보고 금리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섯 번이나, 그것도 큰 폭으로 인플레이션율 전망을 하향조정했고 조정된 인플레이션율이 한국은행의 목표 범위 하단 혹은 그 아래로 내려간 지 오래 됐지만 이에 대한 한국은행의 정책적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만일 민간기업에서 이토록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전망을 번번이 부실하게 해서 손해를 끼쳤다면 기업의 주가는 하락하고 경영진은 자리를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이런 저런 설명을 하는 데 급급할 뿐 다른 대안은 없는 듯하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변경하고 신용 공급을 변경하는 것 이외에도 시장에 여러 가지 신호를 주어 경제주체가 다가오는 경제상황에 맞춰 의사결정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소통의 목적으로 삼는다. 단순히 보도자료를 더 명쾌하게 작성하고 경제지표 설명을 더 논리적으로 한다고 해서 소통을 강화했다고 본다면 이는 소통의 의미를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2013년 성장률 및 인플레이션 전망 수정 현황과 소비자들의 기대인플레이션율 변화 추이. 한국은행은 2011년 12월 처음 2013년 인플레이션율 전망치를 제시한 이래 모두 여섯 차례 대폭 이를 하향조정했다.) |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조정 추이와 인플레이션율 추이. 한국은행은 2012년 초반부터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금리보다 낮아졌지만 기준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모습을 취했다.) |
(생산자물가지수와 수출입물가지수 증가율, 그리고 브레이크이븐레이트 추이. 인플레이션율이 현재의 낮은 상황에서 반등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