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가 2년 연속으로 새로운 회기연도 시작 이전에 예산안 처리에 실패했다. 물론 헌법에 있는 시한인 12월2일 이전에 처리한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언론은 이런 국회에 대해 비난하는 보도를 일제히 내놓았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언론은 이러한 국회의 행태에 대해 "적당히 비난하고 넘어가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할 정도로 애매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우선 많은 언론은 국회가 해를 넘겨 예산을 처리함으로써 "불명예"를 남겼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일이 단순히 명예를 잃는 정도의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54조 2항은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개시 90일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처벌 조항은 없지만 명백히 최종 시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가 이를 어기는 것에 따른 문제는 간단치 않다. 우선 법을 만드는 국회가 최상위법인 헌법에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조항을 어기는 데 따르는 문제가 있다. 국회가 헌법을 지속적으로 어기는데 국민들이 법을 대하는 인식은 어떻겠는가? 또 다른 문제는 현실적인 것으로 정부 특히 기획재정부의 업무가 크게 지장을 받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기획재정부는 세종시에 있는 반면 국회와 청와대, 그리고 주요 정당은 서울에 있기 때문에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은 국회에 오는 일이 여간 큰 일이 아니다. 국회의 힘은 막강해서 필자가 세종시 택시 기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기획재정부 관리들은 국회의원이 부르면 신호와 속도를 무시하고 급히 달려간다고 한다.
기획재정부가 헌법에 정해진 대로 예산안을 작성해 국회에 9월말까지 제출한 뒤에 벌어지는 일을 가정해 보자. 기획재정부와 다른 부처 관리들은 이 때부터 예산안이 국회에서 심의가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은 제쳐두고 여기에만 매달린다. 물론 12월2일까지 국회에서 처리가 끝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요즘처럼 국회 심의가 미루어지는 것은 물론 언제 처리될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부 관리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없다.
결국 새해 시작이 임박하거나 심지어 새해가 시작된 뒤에 예산안이 처리되면 그 때무터 정부 각부처 관료들은 원래 한 달 정도의 기간 중에 할 일을 단 몇 시간 안에 끝마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마 야근이나 휴일 근무도 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시간외 수당이 지급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다른 일도 그만큼 연중 미뤄지는 것이다.
이런 물리적인 피해상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앞에 지적했듯 국회가 헌법 조항을 명백히, 반복적으로 위반하는 것만큼 중대한 문제가 어디 있는가? 물론 내년에 시행될 국회법에는 예산안 심사가 11월30일까지 마쳐지지 않으면 다음 날 본회의에 자동 부의된 것으로 본다고 정해져 있지만, 이 때에도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대표들이 합의하면 이를 지키지 않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중대한 문제에 대해 그토록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이 "불명예"라고 하며 적당히 넘기는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정치권에 "적당히 넘어가며 약점만 잡고 반대 급부를 바라는" 관행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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