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과 한국의 대응』
미국이 2007-2008 자국발 금융위기 이후 금리를 0% 수준까지 낮춘 뒤 양적완화정책을 잇따라 도입함에 따라 신흥국으로의 자본 유입이 늘고 신흥국 통화가 절상 압력에 놓이게 되었고 이에 대해 신흥국들은 불만이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브라질의 기도 만테가 재무장관은 2010년 9월 이를 "국제적 환율전쟁"이라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논평을 내놓았다.
물론 "currency war"라는 표현은 이미 몇해 전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적은 있지만 그 책에서는 이 용어를 금융 및 통화 면에서의 보다 폭넓은 패권 다툼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따라서 만테가 장관이 지칭한 용어는 편의상 좁은 의미로 환율전쟁이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환율전쟁'은 일반적으로는 주요국들이 자국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위기에 대처하려고 한 움직임을 지칭하며 "경쟁적 통화 절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경쟁적 통화 절하 수단은 직접적인 시장 개입, 자본 통제 시행, 그리고 간접적인 방법인 양적완화 정책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큰 폭의 인위적 통화 절하를 통해 해당국은 경쟁국에 비해 수출 가격 경쟁력 확보 ▷ 자국 내 생산 증대 ▷ 고용 확대 ▷ 국내총생산 증가 등의 선순환 효과를 기할 수 있으나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 통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원칙적으로 자국 국민들의 생활형편은 악화되며 인플레이션은 상승하는 한편 외화로 표시된 대외부채에 대한 상환 부담은 증가하고 외국인 투자 유입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등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환율전쟁의 진행 상황과 관련한 그림 자료를 소개한다. (각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 위 그림은 달러, 유로, 엔 등 기축통화와 위안, 엔 환율의 지난 5년간 실질실효환율 가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만테가 장관이 환율전쟁을 비난한 2009년 후반기를 각각 100으로 환산해 이후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면 달러의 가치는 양적완화정책이 여러 차례 시행된 영향으로 2011년 초반까지 하락했지만 낙폭은 10% 정도였다. 그나마 유로존 재정위기가 불거지자 달러 가치는 반등하기 시작했으며 2013년 초까지 2009년 후반 수준을 회복했다.
이 기간 중 위안과 원 가치는 꾸준하게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상승 속도는 가파르지 않고 점진적인 정도다. 다만 위안 가치는 2013년 말경부터 하락반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엔 가치는 이 기간 중 2012년 중반까지는 강세를 유지했으나 이후 아베노믹스 예고 발언과 실제 시행 이후 급속히 하락했다. 이렇게 보면 아베노믹스의 일환은 엔 절하 정책은 확실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하락세는 2013년 초반까지만 이어졌으며 이후 횡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 하지만 환율은 어떤 기간을 비교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변화도 달리 설명할 수 있으며 또 환율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다양하다. 위 그림은 그 앞과 동일한 통화들의 가치 변화를 10년의 기간으로 확대한 것이다. 역시 실질실효환율 기준이다. 이렇게 10년으로 기간을 확대하고 보니 변화 양상은 차이가 느껴진다. 우선 달러 가치는 금융위기 직후 단숨에 20% 정도 상승했으며 이후 하락은 그에 대한 반작용 정도라고 할 수도 있는 모습이다.
원 가치는 2004-2007년까지는 강세를 유지했으며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직후 단숨에 20% 이상 하락했다. 이후 꾸준히 상승했다고 하지만 사실 당시 하락한 것에서 회복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엔 가치는 달러와 비슷하게 금융위기 발생 직후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급등했다가 최근 아베노믹스 시행 이후 2007년 수준으로 돌아간 것 정도다. 물론 달러 엔 등의 화폐 가치가 경쟁적 절하 정책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환율 변화는 어느 기간을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 통화 가치는 엄연히 경제의 기본 체질 즉 펀더멘털과 특히 경상 및 자본수지 등 국제적 불균형 지표에 영향을 받는다. 위 그림은 5년 단위로 경상수지의 GDP 대비 비율 평균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적자와 흑자를 반복하는 순환적 양상을 보였지만 이후 GDP의 2%를 넘는 흑자를 꾸준히 유지했다. 더구나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에는 흑자폭이 확대돼 2010-2014년 기간 중 흑자는 GDP의 4%에 육박했다. IMF 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앞으로도 꽤 큰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은 환율 얘기가 나오면 특히 엔 가치 변화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즉 엔 대비 원 가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배경으로 지적하는 것은 한국 업체들이 일본 업체들과 비슷한 제품을 놓고 수출시장에서 밀접한 경쟁을 벌인다는 점, 따라서 엔 대비 원 가치 상승은 한국 업체들의 수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위 그림은 지난 20년간 엔/원 가치 변화와 한국의 수출증가율(달러 기준)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한국과 일본 업체들이 수출시장에서 직접 경쟁 상태에 있다는 점과 환율 변화가 일정 부분 수출기업의 수익성 및 가격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거나 직접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들은 누구보다 시장 상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에 따른 대응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취한다. 더구나 한국의 주력 수출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경우 휴대폰과 자동차를 기준으로 해외생산이 절반이 넘는다.
↑ 위 그림은 한국은행이 엔/원 환율 변화가 한국 전산업 영업이익률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행은 엔 대비 원 가치가 연평균 12.4%, 24.9% 및 40.5% 각각 상승하는 시나리오를 놓고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 전산업 영업이익률은 각각 0.14%포인트, 0.24%포인트 및 0.35%포인트 축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보기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지만 연평균 엔 대비 원 가치가 10% 이상 오르는 일은 흔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더구나 한국 수출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꾸준히 높아졌으며 최근에는 상승은 아니지만 위축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위 그림은 물량 기준 한국 수출 실적과 세계 수출량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듯 2009년 이후 원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했지만 세계시장 점유율에 큰 악영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환율 변화가 기업들에게 아무 영향을 안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응해나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 그럼 경쟁적 통화 절하에 동참할 수 있는가 하는 흥미로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럴 여지는 낮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첫째, 한국은 미국, 일본, 유로존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어서 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한국 원화의 경우 여전히 절상 압력보다는 절하 압력에 지극히 민감하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그 원인으로는 북한 관련 돌발 상황이나 가계부채 및 대외부채 문제 등의 약점이 노출돼 있어 외국인 투자자본 유출 위험이 크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그리고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등 국제금융시장 불안시마다 원화는 한국 경제 펀더멘털과는 달리 급격한 절하 압력을 겪은 바 있다. 더구나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액 확충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유액을 크게 늘렸으나 아직도 원화 절하를 적정선에서 멈추고자 할 때 그럴 정도로 보유액이 충분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실례로 2008년 중반 원화 절하가 가속화될 때 한국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보유액을 큰 폭으로 소진했던 경험이 있다. 또 현재 대외부채 규모나 주식 및 채권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본 유출 가능성을 볼 때 보유액이 충분한지에 대한 의구심도 남는 상태다.
↑ 환율 변화는 물론 정책 당국으로서는 중요한 변수다. 그러나 원 가치가 하락할 때와 상승할 때 모두 장단점이 있다. 원 가치 상승은 그만큼 국제적 구매력 상승을 뜻한다. 높아진 구매력은 수입 유인을 증대시키고 수입품의 가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원칙이다. 사실 한국은 지금 낮아지는 성장률에 대한 대책이 절실한 상태다. 성장 둔화의 원인에 대해 말할 때면 우리는 보통 높은 가계부채와 그에 따른 가계소비 부진을 중요한 문제로 지적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위 그림은 197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가계지출, 국내투자(건설 및 설비), 순수출의 성장기여도를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듯 가계지출 증가율은 분명히 꾸준히 둔화됐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가파르게 성장이 둔화된 것은 투자다.
↑ 위 그림은 그 추세를 더 쉽게 보기 위해 3 항목을 100으로 놓고 기여율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성장이 둔화되는 만큼 가계지출 증가율도 낮아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전체 성장에 기여한 비중을 보면 사실 가계지출이 문제가 아니고 투자가 문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 위 그림은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부가가치생산성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떠오르는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만한 서비스업 생산성 문제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제조업 생산성이 높아진다고는 해도 특정 산업 및 특정 기업에 의한 왜곡을 감안하면 한국 경제의 제조업 및 서비스업 모두 생산성 부진 문제는 조속히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