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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케인즈, 그는 누구인가?

(※ 네이버 블로그 "그녀생각's 생각"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케인즈, 그는 누구인가?


대공황

1914년 6월 발칸 반도의 심장부 사라예보에서 열아홉 살 세르비아 청년에 의한 총성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후 5년간 계속되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7천 만명에 달하는 군인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군인 7명 중 1명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350만명의 젊은이들이 불구자가 되었다. 전쟁의 혼란과 함께 찾아든 질병과 굶주림은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유럽 전역의 도시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농토와 촌락들은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이미 영국의 경제 규모를 넘어서고 전쟁의 승전국이자 전쟁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미국은 유럽과 달리 유례없는 대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전쟁 중에 크게 발달한 자동차, 전기산업 그리고 이어진 건설 붐은 1920년대 미국에게 새로운 경제를 선사해 주었다. 흔치 않았던 라디오는 미국가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00만 가구가 보유하게 되었으며 소위 있는 집안의 증표로 여겨졌던 자동차는 인구 5명당 1명씩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1929년까지 주가는 6배 가량 올랐으며 주택 및 부동산지수는 2배 가량 상승했다. 1928년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계속되는 호황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빈곤의 종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고 선언했다. 경제에 대한 낙관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1929년 10월 29일 화요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 아침에 뉴욕 증시가 30%이상 폭락한 것이다. 거래소 모인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주식을 사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주식을 팔지 못해 아우성을 친 것이다. 이날에만 11명의 투자자가 자살을 했다. 그러나 이런 패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경제 불황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의 미국 대공황기에 유명한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쓴 글과 주요 뉴스 헤드라인을 통해 당시의 인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설혹 주식시장에 후퇴기가 올지라도 붕괴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 어빙 피셔, 경제학자
“우려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번영의 파고는 계속될 것이다.” - 앤드류 멜론, 재무부 장관
“주식시장의 붕괴는 실제 비즈니스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 아서 레이놀즈, 은행장
“히스테리는 이제 월스트리트에서 사라졌다.” - 런던타임즈
“심각한 경기불황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히려 내년 봄부터 회복하기 시작하여 가을에는 더 많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 하버드경제연구소
“1930년은 눈부신 고용의 해가 될 것이다.” - 미국 노동부
“신사 여러분, 여러분은 60일 늦게 오셨소. 공황은 끝났소.” - 후버 대통령

하지만 미국 경제는 이 똑똑한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했다. 주가는 계속 하락하여 1932년 7월 9일 1929년 고점 대비 89% 하락한 41.88포인트를 기록했다. 주식 가치의 10분의 9가 사라진 것이다. 같은 기간동안 연 평균 1951개의 은행이 무너져 내렸고 결국 만개에 가까운 은행들이 도산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예금자보호도 받지 못해 약 900만개의 예금계좌가 하늘로 증발했다. 그러나 대공황이 더 비참했던 이유는 이러한 금융위기가 금융에서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물 경제가 파탄났다. 1929~1933년 동안 실질GDP는 -26.5%, 산업생산은 -35.5%, 주택착공은 -81.7%, 기업 수익은 -80%, 수출은 -68%를 기록했다. 8만 5000개의 기업이 도산했고 임금은 60퍼센트나 감소했다. 또한 미국의 공황으로 미국 경제에 의지하고 있었던 유럽 전체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공황의 가장 심각한 질환은 대규모 실업이었다. 1400만명의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길거리를 배외했다. 성인 남자 네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 1명은 실업자였던 것이다.

당시 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장 바티스트 세이 등의 전통을 잇는 고전학파 경제학계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고전학파의 경제학에 의하면 불황이란 있을 수 없다. 간혹 발생한다 할지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구렁텅이에 빠진 경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제 질환 목록에는 대규모 실업이란 있을 수 없다. 앞서 보았듯이 당시 많은 경제학자와 전문가들은 시장의 자율 매커니즘을 믿으며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 선전하고 다녔지만 추락하는 경제와 쏟아지는 실업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대공황을 제대로 진단도 할 수 없었고 처방도 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고 때마침 무너진 경제학을 살릴 구세주를 등장시켰다. 그의 이름은 존 메이너스 케인즈였다.

케인즈의 새로운 경제학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에 세상에 나온 케인즈는 천재의 면모를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4살 때 혼자 힘으로 이자의 경제적 의미를 터득했고 6살 때는 자신의 두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히 여겼다. 7살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인 경제학자 존 네빌 케인즈의 유쾌한 말동무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모든 상을 휩쓸며 최상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며 진학한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경제학과 교수였던 마셜 교수는 수학을 전공한 케인즈에게 경제학자가 되기를 간청했고 마셜의 후계자로 지목된 피구 교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케인즈와 조찬을 함께 했다. 하지만 케인즈는 경제학자가 되기보다는 더 큰 성공을 이루고 싶어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된다. 1907년 케인즈는 동인도회사에 발령을 받고 인도로 갔으나 자신은 공무원 체질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케인즈는 2년 동안 지루했던 인도에서 있었던 경험을 살려 1913년에 <인도의 화페와 재정(Indian Currency and Finance)>이라는 책을 쓴다. 케인즈는 이 책으로 인도의 화폐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왕립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이 되었다. 당시 케인즈의 나이는 29세로 그에게는 대단한 명예였으며 더불어 그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공무원을 사직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돌아온 케인즈는 마셜로부터 강사직 제의를 받는다. 경제학 강사로서 케인즈는 마셜의 <경제학 원리>에 전적으로 의존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따라서 초기의 케인즈의 경제학은 고전파 경제학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케인즈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경제학 출판물 <이코노믹저널(Economic Journal)>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경제학과 관련한 많은 저술들과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통찰력과 분석력은 날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케인즈는 고전학파의 경제학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먼저 고전학파 경제학을 대표하는 세이의 법칙을 살펴보자. 세이는 공급이 그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고 했다. 상품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는 재료비, 인건비, 운송비 등의 비용이 든다. 그런데 이 모든 비용은 노동자와 공급업자의 소득이다. 생산자(노동자와 공급업자)들은 이 소득으로 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게 되며 경제는 과잉공급이나 불황이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일을 하게 되는 완전 고용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실제 경제에서는 실업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실업은 일부 노동자들이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높은 임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가 낮은 임금을 받고도 일하겠다는 동의만 있으면 실업은 바로 해소될 수 있다. 이를 자발적 실업 혹은 일시적 실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케인즈는 세이의 법칙을 비웃었다. 경제는 완전 고용 상태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세이의 법칙에서 가정하는 생산에서 소비자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제의 주기적은 흐름에서 중요한 한가지가 빠졌다고 주장한다. 바로 가계의 저축이다. 저축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상품 생산은 생산자에게 소득을 발생시키고 생산자는 그 소득으로 그 상품을 구입하는데 저축을 하게 된다면 상품을 모두 구입할 수 없게 된다. 상품이 다 팔리지 않으니 재고는 쌓일 게 뻔하고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 비용을 줄여야 한다. 즉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자를 해고할 수 밖에 없다. 세이의 법칙이 말하는 자발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은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고전학파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가계는 소득에서 소비하고 남은 돈을 은행에 저축하게 되는데 이때 기업은 가계가 저축한 돈을 은행에서 빌려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원활히 순환하게 된다. 가계가 저축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될까? 앞선 논의를 이어보면 저축이 늘어나게 되면 자금 흐름에 공백이 커지게 되어 경제 침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가계가 저축을 늘리게 되면 은행에는 돈이 쌓이게 되니 대출 금리는 그전보다 더 내려가게 된다. 금리가 내려가 대출 비용이 떨어지니 기업은 그전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 투자를 할 수 있다. 결국 경제의 주기적인 흐름에는 별 문제 없이 이전대로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케인즈는 저축과 투자가 그렇게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계와 기업은 완전 다른 이유에서 저축을 하고 투자를 한다. 기업의 투자는 당시의 정치상황, 기술여건, 환율추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프로야구에서 어떤 팀이 우승할 것인가에 따라 투자 여부가 달라질 수 있으며 우울한 날씨가 계속되면 투자 여건이 좋아도 투자를 안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외부적 상황과 비이성적인 투자자의 감에 의해 투자를 하기 때문에 기업의 투자는 매우 변덕스럽다. 다시 말해 은행의 이자율 여부는 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매우 부분적인 요인밖에 되지 못한다.

가계 저축은 또 어떤가? 가계의 저축도 경제상황이나 가계의 경기 예측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소득이다. 가계는 소득이 높아지면 소비와 저축을 늘리고 소득이 낮아지면 소비와 저축이 줄어든다. 그런데 가계가 저축을 하려는 저축성향과 소비를 하려는 소비성향은 소득의 변화에 따라 다른 속도로 반응하게 된다. 소득이 올라가면 소비는 소득이 올라가는 비율에 따라 올라가지 않으며 저축은 소득이 올라가는 비율보다 더 빠르게 올라간다. 예를 들어 월급이 300만원에서 600만원이 됐다고 소비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연히 저축은 더 빠르게 늘어나게 된다. 반대로 소득이 줄어들면 소비는 그만큼 감소하지 않으며 저축은 그보다 더 큰 비율로 감소한다.

그렇다면 소득이 올라가는 호경기라고 해보자. 소득은 올라갈 것이고 소비는 소득보다 느리게 저축은 소득보다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저축이 소득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니 은행의 이자율은 낮춰지고 고전학파에 의하면 투자는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저축=투자). 투자가 늘어나니 더 많은 상품을 만들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비는 투자가 늘어난 만큼 늘어나지 않는다. 생산된 상품과 소비자들의 구매량 사이의 격차가 발생하게 되고 재고는 쌓이게 된다. 재고가 쌓이니 기업은 당연히 비용을 절감해야 하니 임금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 결국 불황이 오게 된다. 다시 말해 고전학파가 말하는 이자율로 투자가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가계의 상이한 소비성향과 저축성향에 의해서 불황을 초래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고전학파의 논리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논의한 것으로 토대로 만약 경제가 안 좋아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기업은 암울한 경제상황에 반응하여 투자를 꺼리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를 할 것이다. 가계는 소득이 줄어듬으로 소비를 줄이고 저축은 더욱 더 줄이게 될 것이다. 은행에 돈이 쌓이지 않으니 기업의 투자 여건은 더 악화될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경제 체제의 두 주체인 기업과 가계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그 어떠한 힘도 없게 된다. 바로 대공황이 이와 같은 사례였다. 고전학파 경제학은 이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인즈는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케인즈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신의 저서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이하 <일반이론>)에서 불황에 대한 처방을 다음과 같이 조금은 익살스럽게 내렸다.

“정부가 낡은 가방에 돈을 가득 담아 쓰레기로 가득 찬 폐광 여러 곳에 깊이 파묻은 다음 자유방임 원칙에 따라 기업들이 이것을 마음대로 퍼가도록 놔둔다고 하자. 기업들은 돈을 파가기 위해 앞다퉈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고, 이에 힘입어 실업은 사라질 것이며, 사회 전체의 실질 소득과 부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파묻고 파가라고 하는 것보다 (정부가) 주택 같은 것을 건설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주택 같은 것을 건설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앞에서럼 하는 것이 낫다.”

결국 가계 저축과 기업의 투자 부진의 빈틈을 정부가 나서서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개입해 기업의 투자를 대신하고 가계의 소득을 올려주게 된다면 경제의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고 이로 인해 죽어가는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케인즈는 경제의 제 3의 주체로 정부를 등장시키며 정부가 불황을 떠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대공황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정부는 자신도 모르게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확실한 처방전이 나오기 전에 이미 정부는 케인즈의 주장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주체로서 정부의 등장

불황의 타개할 경제주체로 정부를 내세운 케인즈이 <일반이론>은 1936년에 나왔다. 하지만 대공황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빈곤의 종식이 눈앞에 왔다’고 말한 후버 대통령은 빈곤과의 전쟁을 수행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지방에서 폭동이 연달아 일어 났고 워싱턴에서는 남루한 거지들이 줄을 지어 행진했으며 도시의 쓰레기 소각로에는 몸을 녹이려 굶주린 자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쓰레기차에 혹시나 먹을 것이 있나 찾았던 이들이었다. 후버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을 내려 놓고 구제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정부의 활동은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부터이다.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100일 동안 공황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을 실시하였다. 농업조정법을 통해 생산제한으로 농산물의 가격을 지지하고 감산으로 인한 손실은 보조금으로 보전해 주었다. 또한 전국산업부흥법을 전개해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한편 경쟁제한과 가격협정으로 과잉생산을 억제하고 물가하락을 방지해 구매력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33억 달러에 달하는 공공사업을 실시해 실업자를 흡수하고 경기회복을 도모하고자 했다. 케인즈는 1933년에는 서한으로 1934년에는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 정부의 사업을 더 확장할 것을 촉구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100억 달러 수준에서 맴돌던 정부의 총지출은 1934년에는 120억 달러, 1935년에는 130억달러, 1936년에는 15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이라는 케인즈식 처방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민간투자는 바닥에서 벗어나 그동안 줄었던 투자의 3분의 2를 회복했고 가계 소득은 50%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불황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9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부의 노력이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번째 은행위기를 막을 경제 정책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미국은 대공황 이전에 금본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금본위제는 화폐의 가치가 일정량의 금의 가치와 연계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달러를 금 1온스로 고정시켰다면 1달러를 중앙은행에서 금 1온스와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행은 소유하고 있는 금만큼만 화폐를 발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황이 닥쳐와 은행들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도 화폐를 찍어내 은행들을 살린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만개에 가까운 은행이 무너졌다. 혈관이 망가져 버린 경제 순환계는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돈은 전혀 흐르지 못한 상태가 되었고 저축했던 돈들도 날아가버렸다. 대규모 은행도산 사태가 실물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된 것이다.

두번째는 정부지출 프로그램은 완전고용 수준으로 경제를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만큼 충분한 규모로 수행된 적이 없었다. 당시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던 케인즈를 ‘공산주의자’라고 일부 사람들이 매도했을만큼 정부의 개입을 터부시하던 때였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의 재무부 관리들은 균형 예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부가 적극적인 투자를 한다는 빚을 내서 투자를 한다는 말이다. 당시의 관리들은 정부의 재정적자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케인즈는 불황시기에 균형예상 정책을 펴는 것은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일갈했다. 경기가 침체되면 당연히 세금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균형예산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모두 수요를 갈가먹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경제는 더욱 악화되게 된다. 재정적자가 되더라도 정부가 투자를 하고 가계의 소득을 올려주게 되면 경제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세금은 늘어나고 정부의 지출은 줄일 수 있게 되면서 재정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당시에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1030억 달러라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정부 지출을 하였다. 그리고 완전 고용에 이르는 대호황을 만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부채도 엄청나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이상적인 경제학자

우리가 아담 스미스를 자유시장만을 외치고 자본가의 후견인으로 오해한 것처럼 케인즈를 부의 재분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좌파적 박애주의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자산에 비판에 대해 1931년 이렇게 말했다.

“과학적으로 보아 과오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에 적용할 수도 없음을 뻔히 아는 낡아 빠진 교과서를 성서와 같이 불가침한 진리로 섬기는 사상을 어떻게 수락할 수 있는가? 고기보다는 진흙을 택하는 신조, 여러 가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품위 있는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이 성취한 모든 것을 이룩한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차보다 야만적인 프롤레타리아를 상좌에 모시는 신조를 내가 어떻게 채택할 수 있는가?”

여기서 케인즈가 말하는 교과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말한다. 그는 뼈속까지 가문의 전통과 사회계급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를 경멸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바라봄에 있어서는 어떠한 선입견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그저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는 <일반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기능의 확대는 자유방임에 대한 침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지지한다.”

케인즈가 고전파 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자발적 실업을 언급하며 고용과 임금 그리고 특히 가계 소득을 중시했던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던 이유는 어떠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경제 문제를 제대로 보고자함이었다. 케인즈에게 ‘신성한’ 것은 없었다. 

일례로 케인즈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당시 1 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독일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징수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는 무엄하게도 당대의 세계사를 이끈 지도자를 향해 맹렬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 또한 어떠한 정의감에 사로잡힌 행위가 아니었다. 케인즈는 독일을 그렇게 가혹하게 다룰 경우 ‘독일 내에서 내란이 발생할 것이며 그 내란의 승리자가 누구이건 그는 우리 세대의 문명과 진보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예언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실현되었다. 1925년에는 <처칠씨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파운드화를 과대평가한 상태로 금본위제를 도입한 것에 처칠을 대놓고 비판하였다. 1926년 영국 경제는 침체를 겪으면서 그의 견해가 입증되는데에는 1년이란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과 당시의 자유 시장과 정부의 개입을 부정했던 많은 이들에게 케인즈는 비난을 받았지만 대공황에서 정부가 톡톡한 역할을 하고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정부의 강력한 개입으로 경제가 다시 살아나면서 케인즈의 사상은 경제학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자들을 1960년대까지 사로잡게 된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케인즈를 주제로 대중 세미나를 개최했고 경제학자들 사이에 미국의 케인즈로도 불렸던 경제학과 앨빈 한센(Alvin Hansen)교수의 영향에 힘입어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는 케인주의자들을 배출하는 산파역할을 했다. 이후 폴 새뮤얼슨, 제임스 토빈, 로버트 솔로 등의 케인즈주의자들이 경제학계를 주름잡게 된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의 대통령 경제자문위회는 케인즈주의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이다.”

케인즈는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경제학자일까? 경제학사의 권위자인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자신의 저서 <세속의 철학자들>에서 케인즈를 이렇게 평가했다.

“케인즈이야말로 이상적인 경제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신성한 것은 없다’는 태도로 정통 경제학의 좁은 성역을 뚫어버렸다. 그리하여 세계가 앓고 있는 질병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멀지 않고 또 그것을 치료하지 않은 채 내러벼둘 정도로 감성과 지성이 메마르지 않는 한 인간이 나타나 세계를 냉정하게 파헤쳤다. 그는 경제학적으로 세련된 사람이면서 정치적으로 열정적이었다. 바로 이런 기술자적 정신과 낙관적인 가슴이 기묘하게 결합한 데서 그의 비전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케인즈는 자신의 사상에 취해 상아탑에 머물며 세상에 대해 입만 나불대는 그런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1919년에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으며 열강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존 경제학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드러냈으며 경제 불황에 대한 적극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지도자들을 만나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독려했으며 신문 기고와 다양한 소책자들을 통해 절망가운데에서도 풍요의 세계라는 비전을 내비치며 열정적인 의사처럼 처방전을 내 놓았다. 그의 영국대표로 국제경제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때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세워 국제적 화폐 유통의 관리작 역할을 하여 세계 경제의 안정을 꾀하자고 제안했다. 현재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모두 케인즈를 통해 탄생했다.

케인즈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이디어를 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경제는 현재의 경제와 다르다. 새로운 경제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신성한 것은 없다’는 신념아래 현재의 경제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와 암울한 상황가운데에서도 풍요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품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경제학자의 모습. 

하일브로너의 말처럼 케인즈는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경제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 참고문헌

<경제를 읽는 기술 HIT>, 고영성, 스마트북스
<경제사>, 김종현, 경문사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국일증권연구소
<똑똑한 돈>, 나선, 이명로, 한빛비즈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세속의 철학자들>,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이마고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후마니타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경제위기의 패턴>, 게랄트 브라운베르거 외, 웅진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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