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거진 리디노미네이션》
선진국으로 갈수록 돈의 크기가 작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산 지갑에 국내 돈을 넣으면 소위 폼이 안 난다. 한국 지폐는 크기가 달러화나 유로화보다 크기 때문이다. 실제 크기뿐 아니라 단위도 그렇다. 국내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단위가 높은 것에 대한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일상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요즘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보면 5,000원을 5로, 25,000원을 2.5로 표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풍경이다.
국내 화폐단위에 대한 변경 논의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주도한 ‘화폐제도 선진화 개혁안’이 시발점이었다. 당시 개혁안은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고 액면금액을 1000:1로 절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당시만해도 천 단위를 절삭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 기재부에서 경제불안을 우려로 반대했기 때문에 실제 개혁은 미뤄졌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국내 화폐단위를 변경하자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업에서도 회계단위가 너무 커지면서 불편함이 발생하고 있고 환율 측면에서도 네 자리 환율은 우리 경제의 위상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전세계를 돌아보면 통상 저소득 국가의 환율이 이처럼 네 자리인 경우는 있어도 3만불 국가가 달러 대비 환율이 네 자리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3월 한국은행 업무보고에서 화폐단위 변경을 뜻하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 발언 이후 실현 가능성과 영향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5월 1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정책토론회를 공개적으로 열기로 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추진할 계획도 없다”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당장 실행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여건상 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필요성은 나날이 커질 것이기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은 언제든 다시 불거질 문제다. 일단 수면 아래로 잠겼지만 2020년 4월 총선 이후 다시 리디노미네이션이 정치권에서 이슈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화폐단위 변경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첫째, 인플레이션 우려다. 예를 들어 950원의 경우 0.95로 변경되는데 이렇게 되면 쉽게 1.00이 되어 사실상 물가 상승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과거 참여정부 당시 기재부가 반대했던 이유도 이러한 물가 불안이 미치는 부정적 효과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물가가 매우 낮은 상황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안이 반대의 근거가 되기에는 다소 약하다.
둘째, 가장 큰 걸림돌은 부동산이다. 자칫 안정세를 찾아가는 부동산 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는 것을 정부로서는 달갑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로 실물자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긍정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첫째,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새로운 교체수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ATM기기부터 시작해서 소프트웨어를 포함 각종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교체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일종의 경기부양 효과인 것이다. 2004년 한국은행이 5조원의 부가가치를 제시한 바 있는데 현재 시점에서는 최소한 5조원 이상의 경기부양 효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지하경제 양성화다. 이 부분은 정확히 산출하기는 힘들지만 일부에서는 신권으로 교환되는 과정에서 추가 세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자산시장 측면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기존 현금보유자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실물자산 혹은 금융자산이 보다 유리하다. 한편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일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채권자산에는 다소 불리하다. 또한 원화 자산보다도 달러화 자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이 경제활동에서 편의를 극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일부 경기부양 효과를 가지려면 모든 절차가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성공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사항이다. 따라서 이 논의가 충분히 공론화되고 점진적으로 시행된다면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Appendix. 과거 사례 및 영향
▶ 인도: 2016년 11월 단행
- 화폐개혁 목적은 지하경제 양성화로 화폐개혁 실시 즉 전일에 급작스럽게 화폐개혁 시행을 발표
- 인도는 현금 거래비중이 90%를 넘는데 새로운 신권으로 교환을 받아야 화폐가 사용 가능했음. 그러나 은행에서 신권 교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일시적으로 혼란이 확대
- 단기 충격으로 작용했지만 이내 충격에서 회복. 화폐개혁이 중장기적으로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
- 다만 인도 정부가 급진적으로 이를 시행하면서 단기적으로 인도 경제에 대한 충격은 불가피
- 화폐개혁 이후 유통통화는 빠르게 증가하면서 2018년 들어 화폐개혁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
▶ 터키: 2005년 1월 단행
- 화폐개혁 목적은 인플레이션 억제. 급격한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공공부채 증가, 과도한 정부 지출, 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군사비 지출 확대, 경제 주체의 기대 심리 변화 등으로 20세기 후반 높은 인플레이션을 허용
- 터키 정부는 2005년 1월 1일자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 기존 화폐를 100만분의 1로 낮추고 화폐명칭을 변경
- 개혁 이후, 달러당 134만 리라이던 환율이 1.34리라 수준으로 하락. 물가도 6~10%로 안정
▶ 베네수엘라: 2018년 8월 단행
- 화폐 액면가를 100,000:1로 절하하고 신규지폐를 발행 및 외환통제 일부 완화조치 시행
- 베네수엘라는 2014년 유가하락 이후 경제위기가 장기화되면서 환율이 급등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 이 상황에서도 재정지출을 늘리기 위해 화폐를 계속 찍어내면서 물가상승 속도가 가속화
- 그러나 장기집권을 위한 급진적인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해 경제위기는 더욱 번지는 양상
▶ 유럽연합: 2002년 1월 단행
- 1999년 1월 1일 출범한 유로화는 3년간 주식 및 채권시장, 은행, 상품가격 표시 등에서 ‘장부상 통화’로만 존재
- 2002년 1월 일부터 실제 화폐로 통용되며 유럽 각국의 국민들이 유로화를 새 통화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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