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악마화하고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급격히 높이고 각종 수입 규제를 가할 때 대부분 트럼프 개인의 일탈적인 행동쯤으로 여기곤 했다. 인구를 고려하지 않은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위협하고 경제성장률이 선진국을 압도한다곤 해도 여전히 중국은 저개발, 저소득국가인 데다가 누가 봐도 세계의 패권은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는데 왜 그러는 건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선거에서 정권이 바뀌면 미국도 다시 국제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정상적인' 정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혈맹이라는 우방국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파격적인 통상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며 각종 법안과 행정명령을 시행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라든지 반도체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등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조치를 잇달아 시행하면서 급격히 보호무역주의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결국 아직 세계 패권을 주도하고 있고 주요 산업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만, 그만큼 미국이 무언가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방증이다.
이런 일련의 행동에 대해 의아해하던 차에 지난해 후반부터 올해 초까지 두 권의 책을 읽고 조금은 이해할 만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두 권의 책은 바로 『Chip War』(크리스 밀러)와 『반도체 삼국지』(권석준)였는데, 이들 책은 단순히 반도체 산업에 관한 정보는 물론 경제 전반과 국제 관계의 과거와 앞날에 대해 이해를 크게 높여줬다.
미국이 1980년대 말부터 일본을 견제한 배경과 타이완의 TSMC가 세계 최고 파운드리 업체로 성장하게 된 배경, 그리고 미국이 다소 무리한 수를 써가면서까지 중국의 반도체 산업 성장을 견제하고 전통 우방국 기업들에까지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배경 등에 관해 이 두 권의 책은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은 힌트를 준다.
우리는 최소한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첨단기술 기업들의 눈부신 성장을 언론으로 접하며 살았다. 급기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의 세계 시장 지배력이 압도적이며 관련 산업에서의 입지도 절대적이라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성공적인 위치를 개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 표현을 보면서 의아해할 때가 많다. 기업의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 중 하나인 주식 시가총액만 놓고 봐도 지난 2009년말 901억달러 수준이던 삼성전자는 현재 3441억달러 수준으로 4배 가까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TSMC의 주식 시가총액은 2009년말 522억달러로 삼성전자의 절반을 갓 넘는 수준이었으나 같은 기간 무려 10배 가까이로 늘어 지금은 4997억달러로 삼성전자를 크게 앞섰다.
선풍기에서부터 김치냉장고, TV는 물론 휴대폰에 메모리반도체까지 못 만들거나 안 만드는 전자제품이 없는 삼성전자인데 남들이 설계까지 해서 주문하면 반도체 제조만 하는 것으로 알려진 TSMC가 이렇게 급성장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 회사는 이런 성장을 이룩했을까? 왜 전 세계는 TSMC를 상대할 때와 삼성전자를 상대할 때 그렇게 차별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그런 회사를 만들지 못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위상은 허상이란 말인가? 혹시 우리 정부가 타이완 정부만큼 일을 잘하지 못한 것일까? 그럼, 앞으론 어떻게 되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면 여기 소개하는 두 권의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책의 내용은 독자들의 호기심 유지 차원에서 소개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밀러의 책에서 제목으로 선정한 "Chip War"는 반도체 분야에서의 전쟁 같은 경쟁을 뜻하면서도 "반도체와 전쟁 간의 연결 고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아무리 미국이 대국이지만, 결국 전쟁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일이다.
『Chip War』에 소개된 패트 겔싱거(Pat Gelsinger) 인텔 CEO의 다음 말을 들으면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God decided where the oil reserves are, we get to decide where the fabs are."
겔싱거는 지난 1980년대 i486 CPU를 설계한 당사자로 유명하다.
저자 소개: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 터프츠대학교 플레처스쿨에서 국제사 강의
- 미국기업연구소(AEI) 진커크패트릭 객원연구원 겸 외교정책연구소 유라시아 연구 디렉터
- 예일대학교에서 박사 및 석사,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사(역사)
- 개인 홈페이지: www.christophermiller.net
권석준
-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
- 한국과학기술원(KIST) 첨단소재연구본부 책임연구원
-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박사(화학공학과), 서울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화학생물공학부)
책 소개:
Chip War: The Fight for the World's Most Critical Technology (Hardcover 기준)
Publisher : Scribner (October 4, 2022)
Language : English
Hardcover : 464 pages
ISBN-10 : 1982172002
ISBN-13 : 978-1982172008
반도체 삼국지: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과 한국의 활로
출판: 뿌리와이파리 (2022.10.12.)
쪽수: 360쪽
ISBN 978896462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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