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소식을 듣거나 가까이에 있는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보를 챙겨 보거나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렇지 않은 대상보다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식구가 그렇고 친구가 그렇다. 그렇기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국, 일본, 타이완 같은 인접국의 경우도 사람들 대부분이 최근 상황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주요 지역에서 치러질 예정인 선거 정국이 올해 금융시장의 주요 변수로 꼽히는 가운데, 타이완의 총통 및 의회 선거가 가장 먼저 있을 행사가 될 예정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한국인들은 통상적으로 타이완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더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렇다.
이런 가운데 존경하는 하이투자증권 연구원님이 소중한 자료를 발간했다. 길고 중요한 얘기를 누구보다 간략히 정리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 이번에는 무려 1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냥 '타이완 선거가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 정도로 짧게 정리해도 되는 것 같은데, 타이완에 관한 거의 모든 배경과 전망까지 아우르는 충실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본 블로그에는 총통 선거와 관련한 부분만 공유하지만, 독자들은 보고서(『우리는 대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전문을 구해 읽어볼 것을 강력히 권한다.
대만의 정체성
해양의 중국인, 민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주로 명, 청대에 대만에 이주한 집단이 현재의 대만인의 주류인 본성인이다.
여기에 원래부터 대만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과, 국공내전 패배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 잔존세력(외성인)이 합해지며 민족 구성이 복잡해졌다. 최근 대만에서는 중국인과 대비되는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원주민 정체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세대가 지나면서 본성인과 외성인이 혼합되며 격차는 더욱 좁혀지고 있지만, 중국과 같은 언어와 문자를 쓰고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역사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만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대만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대만의 현대 정치사
냉전을 이유로 독재정치를 이어가던 장제스가 사망한 후, 아들이자 후계자 장징궈와 후임 라이칭더는 민주화로서의 이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대만을 배신하고 중국과 수교하는 대신 대만관계법을 통과시켜 대만에 무기를 지원할 근거를 마련했다. 민주화 이행 이후 첫 정권교체의 결과로 천수이볜 정권이 탄생했고, 중국 경제가 부상하는 과정에서 마잉주 총통이 당선되었으나 2010년대 들어 중국과의 갈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2024년 총통 선거
1) 투표에 이르기까지
2020년 차이잉원 총통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민진당은 2022년 말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코로나 사태와 홍콩 시위로 반중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때에 나타난 선거 결과였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불만, 경제 불황과 물가 상승에 대한 비판이 선거를 좌우했다. 22년 선거는 중국에 대한 입장으로만 대만의 선거를 평가할 수 없다는 좋은 사례가 된다.
선거 이후 민진당에서는 당시 부총통이던 라이칭더(뇌청덕)가 당권을 장악했다. 민진당의 심장 타이난 시의 시장 출신인 그는 차이잉원보다 더 강경한 반중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강경 노선은 당내에서 권력을 잡기에는 좋았으나 전국적 지지율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고 지지율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국민당은 반중 감정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친중 정책을 내세우기보다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역내 갈등 완화를 제시하고 나섰다. 마잉주 시대 이후 대만에서는 중국 내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이들은 중국과의 갈등 확대를 원하지 않는다.
국민당은 청렴한 경찰청장으로 알려졌으며 중도적 입장을 보이는 허우유이(후우의)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보수진영에서는 그 외에도 출마 선언이 많았다. 폭스콘 회장으로 중국 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 친중파의 거두인 궈타이밍(곽태명)이 출마를 시도했다가 사퇴했다. 중국에서는 친중 우파 후보들의 단일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우파 성격을 지닌 대만민중당에서는 의사 출신 커원저(가문철)후보가 출마했다. 그는 단일화에 응하지 않았고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진당의 진보적인 정책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대만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우파 반중 성향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2) 대만인의 입장 – 친중/반중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선 이해가 필요
강경한 반중, 대만 독립 입장을 보이는 라이칭더와 친중파라고 하기 어려운 커원져 후보의 지지율을 합하면 과반을 한참 넘는다.
이미 대만인들은 친중 후보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홍콩의 민주화운동 좌절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외성인의 고령화와 함께 대만인이 느끼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해가 갈 수록 하락하고 있다. 대만인은 중국 밖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다.
중국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일수는 없지만, 대만인이 덮어놓고 민진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투쟁의 기수였던 민진당의 사회정책은 가끔 대단히 진보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에 찬성하지 못하거나 민진당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대만민중당은 친중과 진보 모두를 반대하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미국에 대한 굴절된 시각도 대만을 단순한 친미국가로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국은 1970년대 대만을 헌신짝처럼 버렸으며, 아직도 대만관계법이라는 완전하지 않는 법안에 의거해 무기를 지원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대만인으로서는 미중 갈등이 벌어지니 이제와서 다시 대만을 찾는 것이 아쉽고, TSMC 공장을 미국으로 이전하라는 요구사항도 걱정스럽다.
민진당 총통을 선택한다고 대만이 반중친미인 것도, 국민당을 선택한다고 친중반미인 것만도 아니라는 얘기다. 이번 선거에는 총통 선출뿐 아니라 입법의원(국회의원) 선출도 동시에 진행되니, 이를 통해서도 대만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겠다.
타이난 출신 대만 지인의 이야기가 중국에 대한 대만인들의 강경한 입장과 딜레마를 잘 말해준다. "선거 결과가 어쨌든, 우리는 중국의 원 차이나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대만에서는 최근 한국의 택시운전사 영화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 드라마도 자주 봅니다. 여튼 그건 자막을 켜지 않고도 볼 수 있으니까요." (변호사, 타이페이 거주)
3) 중국의 전략 – 라이칭더가 당선된다면 중국의 대응은?
그럼에도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당선 가능성 높은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된다면 중국은 어떤 전략을 선택할까? 라이칭더를 선택한 대만의 입장에 대해, 중국은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단기적으로 중국은 이를 응징한다는 시그널을 보내야 하고, 중국의 무력 시위, 경제적 규제, 외교적 경고 등이 나타날 수 있겠다.
반면 일단 당선된 라이칭더는 안정을 택하는 제스쳐를 보일 것이고 초기 국면을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신임 총통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강경한 성향을 우려하지만 일단 당선되고 나서도 강경론을 이어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지난해 11월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의 발언은 중국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고 판단된다. 일단 중국은 단기간 내 대만 침공이 없을 것임을 밝혔다. 기간을 확정하지는 않았으나, 우크라이나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것은 더더욱 현실성이 떨어진다. 11월 정상회담 성사는 대만 침공이 없을 것임을 밝히는 모종의 의사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은 장기적으로 대만에 대한 침공 가능성 역시 밝혔다고 알려졌다. 중국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에 있다고 판단하는 대만에 대해 합병 의사를 내려놓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단기적으로 침공이 어려우니 장기적 관점에서 대만에 대한 종주권을 놓지 않는 정도로 접근할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당장 대만의 선택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대만의 중화권 문화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힌다. 중국-대만간 통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때는 양국간 관계가 가장 좋았던 마잉주-후진타오 정상의 시대였다. 경고는 경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4) 미국 대선 이후 갈등이 확대될 수도
이번 대만 선거 못지않게, 혹은 미국 대선이 대만 총통선거보다 양안관계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견제를 위해 대만을 레버리지로 사용했고, 오바마 정부가 중단했던 무기 수출도 재개했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의 대만 지원 정책을 이어가, 하원의장이 직접 대만을 방문하는 등 대만 방위를 위한 의사를 확실히 했다. 트럼프 이후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바뀐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올해 말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첫번째 임기때보다는 대만으로부터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제제 수위를 높일 것이라 말하면서도, 대만 방어에 대한 입장은 명확히 하기보다는 모호한 전략을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로서는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에 대한 비용을 받아내겠다는 의사표현이지만, 대만으로서는 곤란해지는 노릇이다.
중국 역시 트럼프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부담스러워하며 미국 대선 결과를 기다릴 것으로 본다. 섣부른 도발은 미국 내 반중 정서를 자극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만 높일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단기간 내에 승부를 걸지 않을 것이라면 대만에 대한 경고를 확대할 필요는 없다.
결국 양안간 갈등은 미국 대선 이후에야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본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된다면 현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겠으나, 트럼프 재선 시 중국에 대한 제제, 관세 부과 확대 등이 집행된다면 역내 지정학적 갈등은 확대되고 미국은 대만 방위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언급할 것이며 대만의 선택은 괴로워질 수 있다. 대선 결과에 따라 갈등이 확대될 수 있어 주의해야 할 것으로 본다.